나이 마흔… ‘꼴찌 음대생’의 화려한 비상

테너 이정원씨가 나이 마흔에 큰 기회를 차지했다. 내년 4월 이탈리아 최고 명문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 데뷔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극장이 공연하는 베르디 오페라 ‘맥베드’ 오디션에 참가해서 ‘맥두프’ 역을 따냈다.

이씨는 성악계에선 드물게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사람이어서 더욱 화제다. 연세대 음대 입학 당시에 그는 음역이 지금보다 한 단계 낮은 바리톤이었다. 1학년 첫 학기에는 30명 가운데 ‘실기 꼴등’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학년 2학기가 시작한 9월에는 축구 경기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 인대 파열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학업에 의욕을 잃었고 이듬해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강원도 양양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면서 오히려 노래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났다. “이탈리아 가곡집 악보를 찢어서 군복 호주머니에 넣고 보초를 설 때마다 꺼내서 노랫말을 읽었어요. 큰 소리로 노래하면 중대장실까지 들릴까 봐 조용히 가사만 읊조렸죠.” 그는 “함께 성악을 공부하던 동기들이 국내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가 치솟는 느낌이었다. 갈망이 무엇인지 군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복학할 때쯤 고음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바꾸고 싶다고 하자 교수님께서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이라는 표정을 지으셨어요. 하지만 제 노래를 듣고서 잠시 생각하시더니 ‘테너를 해도 되겠다’는 허락이 떨어졌죠.” 이씨는 “졸업할 때쯤에는 ‘실기 1등’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중학생 때 성가대에서 노래를 시작한 이씨는 충암고 시절 학교 4중창단에서 활동하며 성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연세대 졸업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1999년 벨기에 베르비에 성악 콩쿠르 우승을 비롯한 국제 성악 경연대회에 잇따라 입상했고 이탈리아·프랑스·핀란드의 오페라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활동했다.

이씨가 이번에 맡은 ‘맥두프’역은 베르디의 이 초기 걸작에서 맥베드(바리톤)와 맥베드 부인(소프라노)에 비하면 분명 조연이지만, 많은 테너들이 애창하는 명곡인 ‘나의 아들들이여’를 부르며 살인자 맥베드를 응징해야 하는 비중있는 역이다. 이씨는 “이제부터 바쁘게 역을 공부하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오는 11월 서울시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베르디)에서 구스타프3세 역을, 같은 달 베세토 오페라단의 ‘아이다’(베르디)에서도 주역 라다메스 역을 맡을 예정이다. 다음달 1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갈라 콘서트에서는 푸치니의 ‘투란도트’ 가운데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등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