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문주 감독과의 추억

엊그제 부산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반가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10월에 열리는 올해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루마니아의 크리스티안 문주(Mungiu) 감독을 초청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올해 5월 칸 영화제에서 미성년 소녀의 낙태문제를 차갑게 그린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최고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올해 나이 39세, 동유럽의 젊은 거장이다.

세 달 전, 칸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작열하는 지중해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던 건, 마지막 날 시상식장에서 보여준 이 땅딸막한 사내의 상기된 수상 소감이었다. “제작비가 부족하거나 스타가 없어도, 충분히 영화를 찍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밤 내가 받은 이 상이, 전 세계 작은 나라에서 힘들게 영화를 찍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

문주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턱시도와 나비넥타이로 차려 입은 시상식장의 관객들은 손바닥이 빨갛게 될 때까지 박수를 쳤다. 그의 수상소감을 의례적으로 치부하기엔, 이 동유럽 작은 국가의 영화환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실 루마니아의 영화산업은 ‘산업’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것이 아니다. 1년에 만들어지는 영화 편수는 겨우 10~15편 남짓. 나라 전체에 영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부쿠레슈티대(大) 하나뿐이며,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가 대략 8억 원 수준이다. 단순한 수치로만 문화를 비교한다는 것은 천박한 일이지만, 고개를 돌려 충무로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작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대략 120편. 연극영화과 없는 대학교 찾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고, 평균 제작비는 약 40억 원에 육박한다는 게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였다.

그런데도 최근 몇 년간 루마니아 영화의 광휘는 놀라울 지경이다. 크리스티 퓨이우(Puiu)가 연출한 ‘라자레스쿠의 죽음’은 지난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 10편에 뽑혔고, 올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1등 상도 이 나라 크리스티안 네메스쿠(Nemes cu) 감독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에 돌아갔다. 어떤 평론가는 매너리즘에 빠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수원지(水源地)라고 까지 격찬했다.

칸에서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을 보며, 삶의 절박함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지 뼛속 깊이 절감했다. 영화는 원치 않은 아이를 갖게 된 미성년 소녀들의 공포를 치밀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 엔터테인먼트로만 영화를 소비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외면하고 싶은 영화일지 모른다. 누군들 재미있고, 즐겁게 살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재미나 위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우리의 지나 온 삶이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당의정만 먹고 살 수는 없다.

하룻 밤 새 바뀐 바람이 소슬하다. 10월이 되면 해운대로 달려갈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야외스크린에서 ‘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이 땅딸막한 사내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