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고의 ‘교향악 올스타전’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등 최정상 교향악단들이 버티고 있는 독일 베를린은 ‘세계 오케스트라의 수도’로 불린다. 하지만 올가을, 이 도시는 아예 ‘오케스트라 공화국’을 선포했다. 지난달 31일부터 16일까지 도시를 수놓고 있는 교향악의 향연인 ‘베를린 음악제’를 맞아서다.

78세의 노(老)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Haitink)는 자신이 30년 가까이 몸 담았던 네덜란드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축제의 개막을 알렸다. 19세기 낭만주의를 문 닫고 20세기 현대 음악을 예고했던 프랑스의 드뷔시와 독일 바그너의 작품을 두 축으로 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지점을 진지하게 되물었다.

곧이어 다음 날인 지난 1일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콘서트 지휘자’로 꼽히는 마리스 얀손스(Jansons)가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자신의 ‘전공 과목’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펼쳐보였다.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Dutoit)는 라벨, 드뷔시 등 프랑스 곡을, 마이클 틸슨 토마스(Tilson Thomas)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함께 말러 교향곡 7번을 연주하는 등 사실상 21세기 세계 교향악단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무대다.

이 축제는 베를린 필 같은 ‘토박이 악단’을 중심으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등 독일의 명문 악단을 아우른 뒤, 바다 건너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미국의 보스턴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까지 초대했다.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루체른 등 대부분의 유럽 페스티벌이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해 별도의 음악제를 꾸미는 것과는 달리, 베를린 음악제는 가을 시즌이 문을 열기 직전의 틈새 기간을 살렸다. 이를테면 정규 리그 개막 직전의 ‘시범 경기’인 셈이지만, 출전 선수 명단만큼은 ‘올스타전’으로 꾸민 것이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을 이끌고 있는 다니엘 바렌보임은 음악회의 지휘봉을 아예 베네수엘라 출신의 26세 청년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Dudamel)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피아노 협연자로 나서며 역할을 바꿨다.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 음악제’가 매년 봄 한국에서 열리는 ‘교향악 축제’를 비롯해 국내 음악계에 던지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 보름이 넘는 음악제 기간에 연주되는 베토벤의 작품은 피아노 협주곡 4번과 교향곡 7번 등 단 두 곡뿐이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브람스의 곡은 찾아보기도 힘들다.

대신 생존 작곡가인 엘리엇 카터와 한스 베르너 헨체의 최신작을 비롯해, 음악제에서 연주되는 30여 곡이 대부분 20세기까지 살았던 작곡가들의 곡이다. 어디서든 매일 들을 수 있는 고전파나 낭만주의 시대의 옛 곡이 아니라, 뚜렷하게 현대 작품을 지향한 것이다.

여름 음악제 기간에 유럽 투어를 갖는 세계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이 ‘홈 그라운드’로 돌아가기 직전에 베를린으로 불러들여서 자연스럽게 비용 절감을 꾀했다. 연주회 최고 티켓 가격이 80유로(10만원) 수준일 정도로, 혜택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가고 있다. 베를리너(Berliner·베를린 시민)들은 매일 밤 필하모니 홀 앞에서 ‘티켓 구함’이라는 팻말을 들고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지휘자와 교향악단의 화려한 명단만큼이나, 뚜렷한 프로그램 성격과 소비자를 우선으로 여기는 가격 정책으로부터도 배울 점이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