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첩보물에 총구를 겨누다

말 그대로 첩보영화의 최후통첩(Ultimatum)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전 세계를 떠도는 전직 암살요원 제이슨 본(Bourne)시리즈의

제3편 ‘본 얼티메이텀’(12일 개봉)이 보여주는 것은 21세기 스파이 액션영화의 궁극적 생존전략이다.

사실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이 장르는 오랫동안 늪에서 허우적거려 왔다. 21세기 첩보 시리즈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새로운 스파이영화가‘본’시리즈다. 1편 ‘본 아이덴티티’와 2편 ‘본 슈프리머시’의 인기도 당초 예상치를

뛰어넘은 것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이 스파이물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고 있다. 대체 무엇이 ‘본’ 시리즈의 인기를 만들고 있을까.

자아 찾기에 나선 지적인 액션 히어로

한때 미국 CIA 최고의 암살요원이었지만 지금은 버림받은 스파이 제이슨 본(맷 데이먼).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난 본은 3편에서 CIA 산하 ‘블랙 브라이어’의 존재를 알게 된다. 바로 자신을 살인병기로 양육한 비밀조직이자, 미국의 치부(恥部)다. 이제 자신을 키워준 존재로부터 생명을 위협받기 시작한 본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사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1~3편을 관통하는 시리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맷 데이먼이 탁월하게 연기한 ‘본’이라는 이름의 스파이는 기존의 스파이와는 기본부터 다르다. 본드 걸을 양쪽에 거느리며 냉전시대를 풍미했던 제임스 본드(‘007’),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는 뼛속까지 스파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은 계속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철학하는 스파이’이며, 동시에 고독한 히어로다.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악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스파이인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CG를 능가하는 아날로그 액션의 쾌감

올해 할리우드 CG(컴퓨터 그래픽)의 정점에 변신로봇 영화 ‘트랜스포머’를 놓을 수 있다면, 전통적인 아날로그 액션의 최고봉에는 ‘본’시리즈가 있다. 이 탁월한 오락영화는 이야기와 액션이 맞물리는 전체적 완성도와 숙련도에서 컴퓨터의 인공적 쾌감을 한순간에 뛰어넘는다.

대신 이 시리즈는 현란한 카메라워크로 ‘아날로그적 쾌감’을 극대화한다. 특히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인 1:1 격투장면, 자동차 추적장면은 3편에서 한층 더 진화됐다. 압권은 모로코 탕헤르에서 벌어지는 추격 시퀀스. 최신무기 하나 없이 좁은 골목길에서 맨몸으로 벌이는 추격과 격투장면은 날것의 쾌감으로 가득 차 있다. 컴퓨터의 힘을 빌린 어떤 블록버스터에서도 즐기기 힘든 놀라운 에너지의 연속이다. 이 에너지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스페인 마드리드, 뉴욕, 파리, 런던 등 3개 대륙 7개 도시로 치닫는다. 주의사항 하나. 가능하면 극장 맨 앞쪽 3열까지의 좌석은 피할 것. 자칫 그 롤러코스터의 현란함에 멀미를 느낄지도 모른다.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 화학작용

이 영화가 이룩한 성취의 대부분은 역시 연출을 맡은 폴 그린그래스(Greengrass)와 주연 맷 데이먼(Damon) 덕이다. ‘블러디 선데이’(2002) ‘플라이트 93’(2006)에서 입증했듯, 이 영국 감독의 특기는 좁은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긴박감. 그는 작가주의 영화뿐만 아니라 대중영화에서도 자신의 장기가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비좁은 런던의 워털루 역, 뉴욕 마천루의 좁은 실내에서 벌어지는 액션을 보고 있자면, 아드레날린이 봇물처럼 솟아오른다. 이 아드레날린의 뿌리에는 고정된 카메라의 안정감을 포기하고 들고 찍는(핸드헬드) 카메라로 일관하는 감독의 고집이 있다. 그 아찔한 카메라의 역동성이 선물하는 것은 생생한 현장감이다. LA타임스는 “그린그래스는 하나의 앵글로 담을 수 있는 장면도 5개 각도에서 잡는 타입”이라면서 “관중과 화면과의 거리감을 줄여 실제 우리가 그 살육과 혼돈의 현장 가운데 있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3부작 전체와 함께해 온 맷 데이먼의 연기야 더할 나위 없다. 1편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의 앳된 얼굴은 어느덧 노련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판단은 더욱 빨라졌고 행동에는 군더더기를 찾기 힘들다. 이 비범한 첩보스릴러는 이제 21세기 첩보영웅의 새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