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왕 전쟁’한치 앞이 안보인다

강동윤의 신예연승최강전(오스람배) 제패로 타이틀전 지형(地形)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지난 14일 벌어진 결승 2국서도 백홍석을 꺾음으로써 강 七단은 우리 바둑계의 현역 다섯 번째 복수(複數) 타이틀 홀더로 탄생했다. 지난 7월 전자랜드배 우승 포함, 당당 2관왕으로 군림하면서 올해 시즌 타이틀 무대의 최고 ‘블루 칩’으로 떠오른 것.

타이틀 전장(戰場)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흡사하다. 기존 제후(諸侯)가 조금만 약세를 보여도 새로운 강자에 의해 가차없이 함락돼 버린다. 타이틀 지도는 그래서 바둑계 판도의 거울에 비유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그랬듯 이곳 역시 끊임없는 영토싸움 속에 신구(新舊) 영웅들이 명멸한다. 변화의 속도 또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국내 기사들 중 현재 ‘최대 주주’는 이세돌이다. 올 들어 6개의 국내외 타이틀을 호령하는 중이다. 개인 연간 최고기록인 동시에 지분율에서도 생애 첫 단독 1위다. 6개 중 도요타덴소배 물가정보배 맥심배는 지난해에 이은 2년 연속 수성(守城)이고, 올해 TV아시아선수권을 처음 손에 넣었다. 지난해 탈취한 GS칼텍스배와 바둑왕전에선 연패(連覇)를 향해 곧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창호는 중환배와 왕위 등 2개 성을 지키고 있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그는 국내외 5관왕으로 이세돌과 같은 ‘지분율’ 속에 팽팽히 맞섰으나 금년 들어 급격히 밀려났다. 박영훈은 올해 성공적 방어로 3연패(連覇)를 이룬 기성을 거점 삼아 후지쓰배를 정복, 2관왕으로 올라섰다. 루이나이웨이(芮乃偉)의 경우는 비록 제한기전이긴 하지만 3개 여성 기전을 독식해 복수 타이틀 홀더 5명 중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한기전이란 나이나 성별, 단위 등에 출전 장벽을 두는 기전을 말한다. 이런 제약이 없는 것이 본격기전이다. 둘은 상금 차이도 크다. 같은 타이틀전이라도 등급이 존재하는 셈. 제한기전은 전적엔 집계되지만 랭킹을 산정할 때는 제외한다. 국제기전 역시 규모에 따라 메이저와 마이너로 구별하고 있다.

올 가을 이후 타이틀 판도는 또 한 번 거대한 용틀임이 예상된다. 그리고 ‘태풍권’의 중심에 이세돌이 있다. 그는 현재 명인전 결승에 선착한 데 이어 국수전 및 천원전서도 4강까지 진격했다. 또 기성전과 10단전서도 사정권에 진입, 올해 2~3개의 타이틀 추가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박영훈도 뒤질세라 국수전 4강에다 GS칼텍스배 도전권을 눈앞에 두는 등 ‘영토 확장’에 분주하다.

과거엔 ‘절대 군주’에 의해 휘둘리던 시절도 있었다. 조훈현은 세 차례나 전관왕을 기록하며 75년부터 90년까지 16년간, 이창호는 92년부터 2003년 사이 12년간 연속으로 국내 ‘최대 주주’ 자리를 지켰었다. 이창호가 94년 작성한 13관왕은 좀체 깨지기 힘든 신화로 꼽힌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춘추전국시대’는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이 각 4관왕에 올랐던 2004년. 올 연말 타이틀 지도는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200여명 전체 프로와 11명의 기존 성주(城主)들 모두 잠 못 이루는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