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사라… ‘21세기 사계’를 연주하다

    입력 : 2007.09.20 00:32 | 수정 : 2007.09.20 09:43

    클래식 음반 릴레이 리뷰 <1> 사라 장의 四季

    비발디의‘사계’를 녹음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은“솔직히 규모가 큰 협주곡은 여러 번 듣거나 연주하면 나 스스로 질릴 때가 있는데,‘ 사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제 들어도 신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EMI 제공

    올 가을, 한국 클래식 음반은 황금빛 풍년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의 ‘사계’를 신호탄으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새 음반과 첼리스트 양성원 교수(연세대)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5곡), 소프라노 임선혜가 참여한 오페라 ‘돈 조반니’(모차르트)에 이어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마지막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까지 대작(大作)들이 숨 쉴 틈 없이 밀려온다. 5회에 걸쳐 새 음반들을 릴레이 리뷰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이 비발디의 ‘사계(四季)’다.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진부해 보이는 이 음악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이 ‘21세기식 해답’을 내놓았다.

    비발디의 ‘사계’가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온 것은 계절의 소리를 음악으로 담아낸, 탁월한 표현력 덕분이다. 비발디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이름 모를 시인의 소네트를 악보에 옮기고, 그 시구(詩句) 하나하나를 음악으로 번역했다. 비발디는 자연의 소리를 음표로 바꾸어, 음표로 풍경화를 그려낸 특별한 음악가였다.

    그동안 이 작품을 연주했던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음표로 사계절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사라 장은 단지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사계’는 사계절에 대한 묘사인 동시에, 사계절에 대한 감흥이기도 하다.


    사라 장의 활 끝에는 봄을 맞이하는 기쁨과 여름날의 지친 기분, 가을의 만족감과 겨울 난롯가에서 느낄 법한 노곤함이 모두 묻어난다. 들릴 듯 말 듯한 가냘픈 소리부터 폭풍처럼 거친 소리에 이르기까지, 사라 장의 바이올린은 놀랄 만큼 광범위한 음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사계’에 담겨있는 사계절의 소리를 감정의 언어로 다시 바꿔내는 비결이다.

    계절 변화에 점차 둔감해지는 도시의 현대인들에게 계절의 변화란 자연의 변화라기보다는 그저 기분의 변화일 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사계’를 감정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재해석한 사라 장의 연주는 ‘21세기 사계’의 새로운 전형이다.

    음악적으로는 전통적 해석과 고(古)악기 연주법을 절묘하게 혼합한 ‘퓨전 스타일’의 연주에 속한다. 1950년대 이탈리아의 현악 앙상블인 ‘이무지치’가 펠릭스 아요(바이올린)와 함께 ‘사계’ 음반을 내놓은 이후, 이들의 낭만적 접근은 오랫동안 ‘사계’의 모범 답안이 되어왔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여러 고악기 연주 단체들이 옛 연주법을 도입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면서, 오히려 개량한 현대 악기로 연주하는 ‘사계’가 구식으로 전락한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라 장과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로 잘 알려져 있는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이 두 가지 연주를 적절하게 섞어 친근하면서도 참신한 연주를 선보인다. 활의 무게를 덜어낸 듯, 산뜻하면서도 날렵한 운궁법(활 쓰는 법)으로 고악기 연주만의 느낌을 전하면서도, 때때로 록 음악을 방불하는 강렬한 비트로 충격을 전하고서, ‘이무지치’ 풍의 달콤한 사운드로 우리의 귀를 간지럽힌다.

    ‘여름’ 1악장에서 8분 음표는 가늘고 여린 소리로 표현되어 더위에 지친 기분을 전해주고, ‘겨울’ 2악장의 바이올린 선율은 빠르고 강한 베이스 리듬과 어우러져 활기찬 느낌을 더한다. 이들의 변화무쌍함은 사계절의 변화만큼이나 변덕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은 어쩌면 ‘자연의 음악’에서 ‘인간의 음악’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 장 “고심한건 여름 3악장, 마음에 드는건 겨울 2악장”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은 나무와 잔디, 따뜻한 햇살이 있는 정원에서 ‘사계’ 가운데 여름 3악장을 연주하는 뮤직 비디오를 찍었다. 녹음(綠陰)이 짙은 자연과 음악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뉴욕 맨해튼의 빌딩 숲 한복판에 있는 스튜디오에 나무와 잔디를 깔아놓고 이틀간 촬영했다. 사라 장은 “음반 녹음을 마치자마자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내 연주를 들으면서 팔이나 활 동작을 맞추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며 웃었다.

    안네 소피 무터와 정경화까지 비발디의 ‘사계’를 녹음한 명바이올리니스트는 적지 않다. 사라 장 스스로도 녹음 전에 선배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음반을 꼼꼼하게 다시 들었다. 그는 “무터의 ‘사계’는 의외로 고전적인 매력으로 가득하고, 정경화는 단지 ‘사계’뿐 아니라 모든 음반에서 열정으로 가득하다. 어떤 음반을 들어도 단번에 정경화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번에 사라 장과 ‘사계’를 협연한 악단은 ‘지휘자 없는 악단’으로 유명한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다. 사라 장은 “ ‘사계’를 녹음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았던 질문도 ‘지휘자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었다. 지난 10년간 꾸준하게 협연하며 호흡을 맞춰왔기에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녹음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곡은 ‘여름’의 3악장이지만, 녹음이 끝난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악장은 ‘겨울’ 2악장”이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답게 올 하반기도 유럽과 미국, 일본 투어 일정으로 빼곡하게 차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이어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협연한 뒤, 곧바로 이 악단의 일본 투어에 합류한다. 그 뒤에는 영국에서 잉글리시 체임버와 다시 협연이 잡혀있다. 사라 장은 “크리스마스쯤 되어야 뉴욕의 집으로 돌아갈 것 같다. 역시 명절은 좋은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