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특집] 권순분 여사, 21세기형 스파이 본과 맞짱 뜬다

평소에는 여자친구 취향대로 로맨틱 코미디만 줄기차게 봐야했던 한영화씨. 5일 연휴인 이번 추석에는 모든 장르의 영화를 섭렵하겠다고 하늘을 우러러 다짐했다. 추석 일주일 전부터 ‘필견(必見) 리스트’를 작성한 영화씨. 파트너를 바꿔가며 하루에 두 편씩 모두 9편을 완전정복했다. 다음은 그가 안내하는 추석영화 관람기.

우선은 열혈 액션 마니아인 내 취향대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쫓고 쫓기는 스파이 영화의 긴박감을 담아내는 데 있어, 이 영국 감독은 가히 전세계 으뜸이다. CG(컴퓨터 그래픽)를 사용하지 않은 맨몸의 액션이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이다. 얼굴과 몸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21세기의 스파이영웅 맷 데이먼의 지적인 매력은 역대 최강.

아 참, 연휴 첫날에는 어머니와 영화를 한 편 함께 했다. 둘째 날부터는 차례 준비에 정신 없으실 테니. 나름 ‘봉사’하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선택했는데, 극장에서 나올 때는 내가 더 뭉클해졌다. 소설가 최인호의 자전소설을 하명중 감독이 연출한 감동의 사모곡(思母曲). 정신 없는 스피드의 요즘 영화에 등돌리던 어머니도 간만에 흡족하신 표정이다.

아버지가 섭섭해 하실거라고? 그래서 ‘마이 파더’에게 고맙다. 입양된 소년의 생부 찾기를 그린 이 휴먼드라마는 알고 보니 실화였다. 어떻게 전개될지가 뻔히 보이는 안일한 플롯이었지만, 다음 장면을 알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생부는 사형수. 그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천하의 악한으로 만들지도 않은 연출에 공감이 갔다. 그건 그렇고, 다니엘 헤니 연기는 가히 괄목상대(刮目相對)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스타인 줄 알았는데, 이제 배우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듯.

아, 이제 여자친구에게도 성의를 보여야 할 시간. 이렇게 방심하다가는 버림받기 십상이다. 그녀의 취향을 존중해 고른 영화는 두 편. 하지만 그녀가 좋아할 줄 알았던 ‘사랑’은 알고보니 내 취향이었다. 참고로 내 별명은 구로동 마초. 곽경택 감독의 ‘사랑’은 완전히 ‘친구’의 멜로 버전이었다. 한 여자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내의 러브스토리. 사랑인지 의리인지 헷갈린다고 여자친구는 투덜거렸다. 로맨틱 코미디를 즐기는 그녀가 만족했던 영화는 봉태규, 정려원 주연의 ‘두 얼굴의 여친’. 정려원의 1인 3역이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여서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 그녀가 정말 두 얼굴의 ‘여친’이다. 여러 개의 인격을 가진 ‘다중이’들이 내 주변에는 왜 그리도 많은지.

니콜 키드먼 이름 듣고 본 SF ‘인베이젼’(Invasion)은 살짝 실망이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신체를 강탈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이었지만, 매끄럽지 못한 편집과 이야기 전개가 몰입을 방해했다. 대기업으로 간 계두식 일당을 그린 ‘상사부일체’도 마찬가지. 전작 ‘두사부일체’ ‘투사부일체’ 때, 하도 천박한 조폭코미디라고 욕을 먹어서인지 엄청나게 순해졌지만, 웃음도 함께 잃어버린 듯 하다.

100% 만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즐길 추석 코미디로는 역시 김상진 감독의 납치소동극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골치아픈 생각할 필요 없이, 웃고 즐길 작품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사기 당한 유해진이 나무에 목 매달고 자살 기도하는 첫 장면에서 완전히 배를 잡고 뒤집어졌다. 납치당한 국밥집 할머니 나문희의 경륜 있는 코미디 연기에도 엄지 손가락 두 개 올리련다. 또 하나의 추천작은 이준익 감독의 휴먼 코미디 ‘즐거운 인생’. ‘권순분…’이 코미디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면, ‘즐거운 인생’은 감동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사회에서 낙오한 40대 남자들이 밴드를 통해 다시 20대의 활력을 되찾는다는 이야기.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이지만, 활력 충만한 마지막 콘서트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