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없는 120분… 고통스럽지 않더라

어머니의 비명을 들은 딸이 기뻐 날뛴다. 그토록 기다린 복수의 순간이다. 검은 상복(喪服)을 벗어 던진 엘렉트라는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몸이 뜨거워졌는지 허겁지겁 찬물을 끼얹었다. 비명이 한 옥타브 오를 때 물은 더 거칠게 알몸에 부딪쳤고, “한번 더 찔러라”를 주문처럼 중얼댔다. 어머니를 벤 오레스테스가 피 묻은 칼을 들고 나타나자, 코러스들이 엘렉트라에게 흰옷을 입혔다.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스 국립극장의 ‘엘렉트라(Electra)’는 정통 희랍비극이었다. 국내에서 그리스 국립극장의 내한공연은 1988년 ‘오이디푸스왕’ 이후 19년 만이다. 지난 21일 제1회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개막작으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 이 연극은 희랍비극의 원형을 보여줬다. 살해 장면을 무대 뒤로 숨기는 문법, 코러스의 역할, 배우들의 우렁찬 발성, 야외공연 방식의 원세트 무대, ‘하루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담는다’는 원칙, 논쟁과 교훈 등 늙었지만 힘있는 전통이 살아 있었다.

오레스테스 일행이 객석 통로로 등장하며 막이 열린다. 여전히 아버지(아가멤논)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엘렉트라. 살아 있는 건 어머니(클리템니스트라)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드디어 자신이 피신시켰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장성해 돌아온 것이다.

엘렉트라는 질기고 거칠었다. 건초가 깔린 무대 위를 뒹굴고, 벽에 몸을 던져 부딪치고, 여동생(크리소테미스)과 격렬히 논쟁하며 감정을 토해냈다. 오레스테스가 정체를 숨긴 채 ‘오레스테스는 전차경기 중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슬픔은 극점으로 차올랐다.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고 바닥까지 긁어내는 연기력이었다.

코러스 15명도 눈길을 끌었다. 때론 엘렉트라의 친구가 돼주고,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맑은 노래와 춤을 보태는 등 비중이 막중했다. 일대일 논쟁이 붙을 땐 두 패로 갈라져 균형을 맞춰줬다. 독일의 세계적인 연출가 페터 슈타인은 새로운 해석보다는 정통 비극의 형식에 집중했다.

클리템니스트라가 들고 나온 불은 극이 끝날 때까지 타오르며 연기를 뿜어냈다. 관객은 배우와 같은 공기를 마셨고, 인터미션(중간 휴식) 없는 120분짜리 연극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은 10월 27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이어진다.
문의 (02)2280-4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