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없이도 역사 전하는 힘, 그게 영화다”

▲문쥬: (웃으며) 정확하게는 세 번째가 아니라 2.5번째다. 두 번째 작품은 6명의 감독이 한 편씩 만들어 붙인 옴니버스 영화였으니까. 난 20분짜리 중편(로스트 앤 파운드: Lost And Found)을 연출했다. 사실 원래는 나도 당신처럼 소설가를 꿈꿨었는데.

▲함정임: 그러잖아도 대학 때 첫 번째 전공은 영문학이었다면서.

▲문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첫 직장은 루마니아의 한 오케스트라였다. 악기를 연주한 건 아니고, 티켓을 팔았었지(웃음). 그리고 대학 영문과를 나온 뒤에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신문기자도 잠깐 했다. 늘 스토리텔러로서의 직업을 꿈꿨다. 지금은 그걸 영화로 구현하는 거다. 80년대까지 루마니아 영화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정치선전영화)였다. 괜찮은 영화가 거의 없었지. 난 실생활에서 구체적인 삶을 담아내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문학 공부와 기자로서의 현장 경험은 영화에도 큰 도움을 줬다.

▲함정임: 사실 극작가 이오네스코(Ionesco· 1912~1994: ‘대머리 여가수’ 등)를 제외하면, 루마니아 문학과 예술에 대해 잘 몰랐는데, 당신 영화를 보며 루마니아가 궁금해졌다.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아무런 설명 없이 “1987년 루마니아”라는 한 줄짜리 자막으로 시작한다. 의도가 있었을 텐데.

▲문쥬: 1989년은 루마니아에서 공산주의가 붕괴한 해다. 1987년은 붕괴 막바지. 모든 것을 탄압하고 압박하며 닫혀있는 시대였다. 그걸 한 문장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사실 1970년대에는 공산주의 치하였지만 그렇게 경제사정이 나쁜 건 아니었다.

▲함정임: 그런데도 역사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루마니아를 포함, 동유럽의 예술가들에게는 ‘거대담론, 거대역사’ 강박이 있지 않나. 당신은 그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 보인다.

▲문쥬: 1987년 루마니아를 내세웠지만, 영화는 루마니아 관객만 보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싶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 영화는 공산정권이 쓰레기라고 욕하는 영화도 아니고, 역사를 전달하려는 영화도 아니다. 주제를 먼저 던지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나는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함정임: 문학 하는 사람이 볼 때는 바로 그런 부분이 당신 영화의 힘이다. 내 경우, 1987년 루마니아와 2007년의 서울·부산은 극명하게 다른 시공이지만, 강력한 동질감과 공감을 느꼈다. 낙태금지법 치하의 당시 루마니아 소녀들이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지금·이곳의 소녀들이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록 그것이 욕망의 과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궁지에 몰린 여성의 불안한 삶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칸 영화제는 물론 잊을 수 없는 영광이었겠지만, 당신에겐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있을 것 같다.

▲문쥬: (간절한 표정으로) 정말 그렇다. 이렇게 주목 받고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된 건 너무나 좋은 일이지. 칸 이후 60개 나라가 내 영화를 사주었다. 그런데 그 모든 나라에 가서 똑같은 이야기를 매번 해야 한다고 생각해봐라. 나는 이제 새 영화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옛날 영화 이야기를 매일 해야 하는 거다. 소모적인 일이지만, 그래도 어떡하나. 당연히 감수해야지.

▲함정임: 부디 부산에서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시간이 되기를. 뭘 제일 하고 싶나.

▲문쥬: 심사위원으로 봐야 하는 영화가 너무 많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심사할 영화 말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다. 프로그램 리스트 받았으니까, 이제 골라 봐야지. 그래도 혹시 시간이 남는다면 해운대 바다 속에서 수영하고 싶다. 태평양을 좋아하는데, 아직 아시아 쪽에서는 들어가 본 적이 없거든.

▲크리스티안 문쥬(Mungiu)는?

최근 세계 영화의 새로운 활력으로 급부상한 루마니아 영화계의 젊은 기수. 신문기자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생계에 필요한 돈은 광고를 찍어서 벌고, 예술은 영화를 통해 구현한다는 신념을 지녔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올해 부산영화제 게스트 중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 중 한 명. 1968년생.

▲함정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느라 신춘문예 당선통보를 하루 늦게 받았다는 특이한 소설가. 롤랑 바르트의 ‘영화관 관람주의’(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에 동조하는 영화광이다. 일 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은 시월이고, 그 이유는 부산영화제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 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하며 거처를 부산으로 옮겼다. 영화제 기간 중 하루 평균 두 편 정도를 관람한다. 1964년생.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삶의 벼랑에 몰린 두 소녀에 대한 냉정한 관찰기.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미성년 소녀가 불법낙태를 시도하며 겪는 이틀을, 치밀한 리얼리즘으로 묘사한다. 차우셰스쿠 공산 정권 치하의 루마니아를 시공으로 했지만, 감독이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 소녀들의 내면 풍경과 타인에 대해 느끼는 공포감은 2007년의 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월드 시네마’ 부문 초청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