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의 여왕 잊었어요 바닥 치고 새롭게 떠오를 거예요”

    입력 : 2007.10.11 00:19 | 수정 : 2007.10.12 17:05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진출한 ‘발레 샛별’ 박세은

    아메리칸발레시어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발레리나 박세은.
    박세은(19)은 올해 스위스 로잔발레콩쿠르 우승자라는 걸 기억에서 지워버렸다고 했다. 지난 8일(한국시각 9일) 미국 뉴욕에서 그를 만난 날은 ‘콜럼버스 데이’(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날)였다. 지난달부터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스튜디오 컴퍼니에서 활동 중인 이 ‘로잔의 여왕’은 “콩쿠르는 ABT에 몸을 밀어넣는 기회를 줬을 뿐이고, 요즘엔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가 ‘10 to 6’예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클래스와 리허설이 이어지는데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첫 1주일은 안무가가 말을 걸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아서 눈물로 보냈어요.”

    한식당에서 떡볶이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발레리나가 화제를 바꿨다. “팔로마 헤레나 아세요?” ABT 수석무용수로 ‘아치(Arch·둥글게 솟은 발등)’를 가진 발레리나로 유명하다. 박세은은 볼펜과 수첩을 뺏어 그림을 그렸다. “저는 밋밋한데, 팔로마는 발등이 이렇~게 도톰해서 춤의 모양이 달라요. 줄리 켄트(역시 ABT 수석)도 그렇고….”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가장 닮고 싶은 발레리나는 디아나 비시노바예요. 저처럼 몸은 별로인데, 표현력과 테크닉(기술)이 좋아서 그 배역과 이야기에 집중하게 해요. 몸 덕에 예쁜 춤 추는 사람은 그냥, ‘괴물’ 같아요.”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영국 로열발레단과 함께 빅3로 꼽히는 ABT는 스튜디오 컴퍼니와 메인 컴퍼니로 구성돼 있다. 박세은의 스튜디오 컴퍼니(보통 12~13명)는 재능있는 발레 무용수를 길러 메인 컴퍼니에 공급하면서 독립적으로 해외 공연까지 하는 프로 발레단이다. 메인 컴퍼니의 스타급 무용수들과 같이 연습해 배울 게 많다고 했다. “줄리 켄트와 한 공간에 있는데, 처음엔 정신이 멍했어요. 근데 몸 푸는 건 똑같더라고요. 요즘엔 메인 컴퍼니의 발레리노 여럿이 동시에 파드되(2인무)를 추자고 해서 고민이에요.”(웃음)

    박세은은 당장 10월 17~18일에 코스타리카로 가 ‘돈키호테’ 2인무 등을 춘다. 올 하반기에 메인 컴퍼니로 올라가는 크리스틴 세브첸코(박세은이 금상 없는 은상을 탄 2006 잭슨콩쿠르 동상 수상자)보다 좋은 배역을 맡았다. 박세은은 “ABT 메인 컴퍼니는 1년에 10여회 공연을 하는데, 평소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배역 결정이나 승급에 있어선 냉정하다”며 “지금은 내년에 메인 컴퍼니에 들어가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의 발레 가방에는 레오타드(발레 연습복), 토슈즈, 스타킹, (수선용)실·바늘, 도시락 그리고 전자사전이 들어 있었다. 영어가 막힐 때마다 전자사전을 꺼낸다고 했다.

    100년 넘은 ABT 건물의 연습실은 바(bar)가 녹슬고 바닥 여기저기가 움푹 패여 있었다. 박세은은 “시멘트 바닥에서도 연습할 수 있고,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ABT의 스타였던 마흔 네 살의 발레리나 알렉산드라 페리가 올해 은퇴했다. 영국 로얄발레단의 다시 버셀도 마찬가지다. 발레 샛별은 무슨 생각을 할까. “때가 된 거겠죠. 몸이 안 따라줄 땐 저도 미련없이 그만둘 거에요. 한국에서 솔로를 추는 것보다 여기서 군무를 하는 게 나아요.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 행복한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