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촉촉한 시선] 해운대의 영화적 제방

태풍경보가 내려졌던 지난 주말 해운대 백사장.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자그마한 포크레인 한 대가 열심히 모래를 쓸어담고 있었습니다. 어딘가 부조리 연극 같지 않습니까? 해변 한가운데 덩그마니 놓여 있는 포크레인이라니요. 영문을 알고 보니 모래로 제방을 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태풍 크로사에 대한 일종의 방비책이라는 것이었지요. 백사장에는 조립식으로 만든 영화제 전시관이 몇 군데 있었거든요. 사실 한 번 더 기가 막혔습니다. 제방의 크기라야 어른 가슴 높이 정도 될까요. 태풍이 들이 닥치면 저런 허술한 제방이 어디 구실이나 하겠어요?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부산영화제 이상용 프로그래머가 정색합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나요? 분명 조금이라도 파도를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오늘(12일) 부산국제영화제가 아흐레간의 일정을 마치고 폐막합니다. 궂은 날씨로 분위기가 썰렁해진 탓도 있지만, 올해는 유난히 구설이 많았죠. 영화제가 권력의 오만에 빠졌다, 외형은 커졌는데 행사 진행은 미숙하다, 이제는 축제가 아니라 제도가 되어버렸다 등등. 오해도 있었겠지만, 조직위 입장에서는 귀담아 들어야 할 쓴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이 야트막한 제방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2007년의 세속도시에서 영화제가 맡은 역할이 바로 거대한 태풍 앞의 모래 제방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거죠. 영화에서 교훈이나 교양을 얻으려는 관객은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고, 예술보다는 엔터테인먼트로 영화를 소비하는 시대잖아요.

그날 밤 부산이 고향인 곽경택 감독과 해운대에서 소주를 마셨습니다. 흥미로운 얘기 한 토막을 들었죠. LA 출신 감독들은 무조건 돈 버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유럽의 감독들은 ‘좋은 영화’는 돈을 벌 수 없다고 주장하며, 뉴욕 출신 감독들은 ‘좋은 영화’라면 돈도 벌 수 있다고 믿는다고요. 뉴욕대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곽 감독의 ‘출신성분’을 가감(加減)해서 판단해야겠지만, 어쩌면 영화제 출품작들은 ‘뉴욕’과 ‘유럽’의 영화에 가까운 작품일 겁니다.

이번에 부산을 찾은 세계적 거장들의 말들도 생각납니다. ‘양철북’으로 이름난 독일의 폴커 슐렌도르프(68·Schlondorff) 같은 이는 이러더군요. 지난 7월 잉마르 베리만(Bergman)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Antonioni)가 하루 상관으로 세상을 떠난 뒤, 영화의 어떤 시대 하나가 종말을 고했다는 느낌이라고. 영국 출신 거장 피터 그리너웨이(65·Greenaway)는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2년에 한 번 영화관을 찾는다나요. 그래서 더욱 이들에게는 부산이 특별한 느낌이랍니다.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마지막 보루랄까요. 단순한 재미와 오락거리의 거대한 올가미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삶에 대한 본질적 고민과 질문도 던져볼 수 있는 영화적 소도(蘇塗) 말이죠.

다행히 올해 제방은 범람하지 않았습니다. 그 해운대의 영화적 제방이 내년에는 부디 더 높고 튼튼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