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초제 맥 이어받아… 북 기관원도 울린 명창

서울에서 기차로 2시간. 전북 익산에 사는 2007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를 찾아갔다. 1m50의 ‘작은 거인’이 대문을 열고 나선다. 한국 여류 명창으로는 처음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완창한 오정숙 명창(72)이었다. 온화한 웃음이 그늘 한 점 없이 화사하다.

올해 오 명창에게는 큰 경사가 둘이나 겹쳤다.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1907~1974) 탄생 100주년과 함께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국악계의 큰 후원자였던 방일영 전 조선일보 고문에 대한 추억을 묻자, 명창은 “어른은 어릴 적 내 소리를 무척이나 아껴주셨어”라며 회상에 젖는다.

오 명창은 지난 6일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일에 하루 두 차례 무대에 올랐다. 초대 국립창극단장을 지낸 스승 동초 김연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명창의 삶과 음악을 조명하는 기획 무대였다.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느라 오자(誤字)가 적지 않았던 판소리의 사설에 장단을 붙여가며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김연수 선생의 공적으로 꼽힌다.

김연수 선생이 정립하고 오 명창이 맥을 이어간 소리를 김 선생의 아호를 따서 동초제(東超制)라고 부른다.

오후 2시 제자들과 함께 ‘작고(作故) 명창 열전’ 무대에 올랐던 오 명창은 이날 저녁 8시 개막 콘서트에서 다시 김청만 고수의 북에 맞춰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동헌 경사’ 대목을 열창했다. 가을 바람이 쌀쌀한 가운데에도, 옥 구르듯 단단한 소리로 4000여 청중을 휘어잡은 명창의 무대는 이날 개막 콘서트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스승을 기리는 일에는 지금도 정성을 아끼지 않는다. 오 명창은 1972년 판소리 춘향가 완창을 시작으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흥보가·수궁가·심청가·적벽가의 순으로 매년 완창했다. 예순을 앞둔 1994년에도 수궁가 완창 무대를 열면서 소리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제 자랑은 못합니다”는 명창의 말은 여전히 수줍게 들린다.

장장 8시간 30분이 걸렸던 춘향가 완창 때는 스승 김연수 선생이 객석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평소 가사 하나만 틀려도 호통 치시는 분이었기에, 소리하던 중에 어쩌다 눈을 뜨고 객석만 바라보아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너무 무서우신 분이라 ‘불호랭이’로 불렸지. 평소에는 아버지처럼 인자하시다가도 북채만 들면 딴 분으로 변했어. 그렇게 무섭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짧은 시일에 완창이 가능했던 것 같아.”

스승의 소리를 동초제로 이어간 오 명창은 독일 분단 당시인 1985년 서베를린에서 열렸던 ‘세계 민속 음악제’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말이 들릴 리 없었지만, 벽안(碧眼)의 청중들은 오 명창의 소리에 1시간 40여 분 동안 숨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책을 보면서 들으면서도 웃을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함께 울더라고. 끝나고 기립 박수를 보낼 때 ‘우리 소리가 세계에 통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1990년 10월 북한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통일음악제에서도 오 명창의 심청가에 기관원들마저 “심청이가 아바이를 부를 땐 내레 눈물이 뿍 나왔시요”라고 했다. 그렇게 명창의 소리엔 국경도, 남북도 없었다.

“나를 이겨먹는 소리꾼이 나와서 얼른 판소리 동초제를 부흥시켰으면 좋겠어.” 판소리 춘향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됐고 판소리 다섯 바탕 완창 음반까지 내놓았지만, 명창의 소리 욕심에는 도무지 끝이 없어 보였다.  

심사평… ‘판소리 완창’의 멋 일깨운 선구자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들은 우선 예술계에 가득한 거품을 걷어내고 튼실한 알곡을 찾아내려 애썼다. 특히 재승박덕형의 표피적인 화려함보다는 ‘성어악(成於樂)’의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예인(藝人)을 뽑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안목의 조망경에 들어선 몇몇 후보들을 대상으로 설왕설래의 숙고 끝에 흔쾌히 결정된 수상자가 곧 오정숙(吳貞淑) 판소리 명창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명창의 반열에 설 수 없음은 많이 들어온 상식이다. 오 명창 역시 예외가 아니다. 14세 때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오직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정진했다. 특히 오 선생은 1972년, 8시간여에 걸친 동초제 춘향가의 완창을 시작으로 매년 한바탕씩, 현존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50~60년대만 해도 판소리의 완창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다. 모두가 토막소리 공연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동진 명창에 이어서 여류로는 처음으로 오 명창이 판소리 완창의 관심과 진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웠던 것이다. 금년은 동초 김연수 명창의 탄신 100주년이다.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고 흠모해 오던 제자가, 그 분의 탄신 100주년에 동초제 판소리 정립의 공로로 상을 받게 되니 분명 수상의 의미가 배가(倍加)되는 느낌이다. 심사위원 일동도 두 배로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