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둑 영웅들아, 이번엔 날 좀 품어봐”

나는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트로피다. 1996년 조선일보가 이 대회를 창설할 때 세상에 태어났다. 키가 50㎝에 불과하지만 장미목에 순금과 은도금을 배합한 나의 자태는 다른 어떤 우승컵보다도 날렵하다. 만천하 프로기사들은 세계 1인자의 명예와 최고 상금(2억 5천만원)의 상징인 나를 차지하고 싶어 언제나 몸살을 한다. 나 역시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는 누구 품에 안기게 될지 가슴이 설렌다. 그런 생활이 어언 12년째로 접어들었다.

별첨 표를 보면 알겠지만 나는 변덕이 좀 심한 편이다. 초기 4회 때 까지는 한·중·일 3국에게 공평히 눈길을 주었고, 5회부터 8회까지 4년 간은 아예 한국 기사들만의 잔치판을 지켜보았다. 외국 기사들의 불평이 터지자 나는 슬그머니 ‘한국 기사 결승전 출입금지’팻말을 내걸었다. 그게 벌써 3년째 계속되면서 이번엔 한국 쪽이 완전히 풀이 죽었다.

그래서 올해 8강전엔 한국 4명, 일본과 중국 각 2명씩을 초청했다. 올해는 심술부리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볼 작정이다. 금년엔 준준결승 네 판 중 이세돌(24)대 장쉬(27) 전에 특히 눈길이 간다. 한국 7관왕과 일본 4관왕의 만남은 웬만한 결승전서도 보기 힘든 황금 카드다. 이 판의 승자가 나를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에 나도 공감한다. 돈 호세와 에스카미요의 결투를 지켜보는 카르멘의 심정이 이랬을까. 공교롭게도 둘은 모두 과거에 나와 한 번씩 데이트를 즐겼던 사람들이다.

박정상(23)대 후야오위(胡耀宇·25)전도 예측 불허의 빅 매치다. 박정상은 지난해 나(LG배)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인 후지쓰배와 한 차례 랑데부했던 전력이 있다. 솔직히 그때는 질투도 했었다. 하지만 박정상이 후지쓰배만 좋아하고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그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 중국 랭킹 2위인 후야오위도 멋진 청년이다. 지난해 결승 때 그가 나를 사이에 두고 저우쥔쉰(周俊勳)과 사투를 펼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졸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온소진(21) 四단과 한상훈(19) 초단. 나는 한국의 이들 두 젊은 청년들과도 악수를 나눌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있다. 통합예선부터 본선 2회전까지 각각 6연승을 하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용맹함과 지혜로움에 나는 완전히 반했다. 이런 젊은이들이 내게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올수록 한국 바둑은 더욱 발전해 갈 것이다.

일본은 천원 타이틀 보유자 고노린(河野臨·26) 九단이, 중국은 류징(劉菁·32) 八단이 각각 이들의 대항마로 나온다. 일본 기사가 8강 이상에 진출한 것은 9회 때의 장쉬 이후 3년 만이다. 장쉬와 고노린이 아니었다면 올해 8년 만의 일본 나들이가 불가능했다고 한다. 중국도 사정이 급한 눈치다. 우리 ‘우승컵’들 가운데 올해 중국의 초대에 응한 친구는 춘란배(구리 우승)뿐이었고, 나머지 트로피 동료(도요타덴소 농심 TV아시아 후지쓰 중환배)는 모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류징이 그 설욕의 한 축을 맡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상대 전적에선 이세돌·장쉬 전이 맞수 대결답게 2승 2패로 호각이고, 나머지 3판은 모두 첫 대면이란다. 1인당 3시간, 1분 초읽기 5회의 스릴 넘친 열전을 나만 지켜볼 수 없어 LG홈페이지(baduk.lg.co.kr)와 사이버오로(www.cyberoro.com )로도 실황을 공개할 작정이다. 이번 도쿄 나들이가 끝나면 내년 초 결승을 거쳐 나와 데이트할 후보는 8명에서 단 2명으로 좁혀진다. 용기와 열정과 재능을 모두 쏟아 부어 내 마음을 사로잡을 진정한 영웅은 과연 어느 나라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