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는 울고 싶다

서울 시내의 한 고미술상가에 있는 A화랑. 10호(53×40.9㎝, 풍경 기준) 크기의 해경(海景·바다경치) 그림에 근대화가 오지호(1905~1982)의 이름이 서명돼 있다. 진짜라면 1억~1억5000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화랑에서 판매하는 이 작품 가격은 250만원. 진짜냐고 묻자 화랑 관계자는 “몰라요. 진위는 나도 몰라요”라고만 답했다. 이 그림을 본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의 감정위원은 “구도, 색감, 서명, 작품가격 등을 볼 때 아예 논할 필요가 없는 가짜”라며 “이런 데서는 해경엔 오지호, 정물엔 도상봉이라고 무조건 써놓고, 죄의식 없이 가짜를 판다”고 말했다.

◆10점 중 3점은 ‘가짜’

잇따른 ‘위작(僞作)’ 사건으로 한국 미술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작이 있어 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위작을 막는 감정 시스템 등 장치가 부실해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밀어내듯 가짜가 범람하고 있다.

한국화랑협회 산하 감정연구소에서 지난 20년(1982~2001) 동안 의뢰받은 2525점의 미술품을 감정한 결과 30%가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10점 중 3점이 가짜라는 뜻이다. 유명 화가 작품일수록 가짜가 판을 치고 있다. 이중섭 화백은 위작 비율이 무려 75.5%였고, 허건(65%)·박수근(36.6%)·천경자(40.6%)·김기창(30.8%)·이상범(31.5%) 등도 위작이 많았다.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송향선 감정위원장은 “한 번 감정해서 위품(僞品) 증서를 끊어준 그림이 얼마 뒤 다시 감정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위작 유통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변찬우 부장검사)는 14일 이중섭·박수근 화백의 가짜 그림 2800여 점을 시중에 유통시키려 한 혐의로 김용수(68) 한국고서연구회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검찰은 또 김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위작으로 보이는 작품 64점을 추가로 발견했다.

◆위작화가 80여명 활동

위작은 어떻게 만들어져 유통될까. 지난 4월 변시지(81)·이만익(69) 화백 등 유명작가 24명의 위작 90여 점을 유통시킨 일당이 붙잡혔다. 이들의 조직망을 분석해보면, 1대1 접촉으로 위조 제작과 거래를 하는 점조직 방식이다. 대개 화랑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위조총책이 위작화가를 물색하고, 중간 판매상(소위 ‘나까마’로 불림)을 통해 화랑 등 미술시장에 위작을 뿌린다. 주로 무명 화가나 영화간판 화가 등이 위작화가로 동원되는데, 최근에는 한국미술협회 회원인 서양화가가 박수근 화백 위작을 그려 충격을 주기도 했다. 화랑협회의 ‘한국 미술품 감정 현황과 주요 실태’ 조사에 따르면, 근래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위작화가는 80여 명에 달한다. 대개 위작화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베끼지만, 경기도 파주와 안양·안산 등에 ‘위조 공장’을 차려놓고 작업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위작도 A급·B급·C급 있어

위작에도 A급·B급·C급이 있다. A급 위조범들은 도록 작품을 1:1 실물크기로 조정한 후 종이나 캔버스에 빔프로젝트를 쏜 후 그걸 그대로 베끼기도 한다. 종이를 수십 년, 수백 년씩 돼 보이게 하기 위해 도토리 삶은 물에 담그기도 하고, 가스레인지 불로 살짝 굽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예 작품 제작연도에 나온 종이를 구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사용한다.

일부 A급 위작은 특정 작가의 화풍은 물론, 물감, 종이까지 완전히 익혀 새롭게 창작을 하기도 한다. 경찰 관계자는 “노령(老齡)의 유명화가들이 위조범들에게 인기 있다”며 “최근 뚜렷한 작품활동이 없어 위조가 적발되기 어렵고, 작가가 사망하면 진품 감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허술한 감정 시스템

위작은 중간판매상을 통해 화랑이나 수집가에게 ‘진품’으로 둔갑해 판매되고, 수집가를 통해 다시 경매회사에 나오는 등의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작품 세탁이 이뤄진다. 한 화랑 관계자는 “화랑에서는 위작인 줄 알면서도 판매하기도 하고, 중간판매상에게 속아 진품으로 알고 팔기도 한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미술작품을 수집해온 수집가 A씨는 “이전에 작품 거래를 해오던 안면 있는 이들로부터 ‘특별히 싸게 준다’거나 ‘(소장자가) 급히 팔아야 할 사정이 생겼다’고 하면 속아 넘어가기 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허술한 미술품 감정체계가 위작을 방치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국내에 미술품 감정인력은 150여 명에 불과하고 작가별 전문가는 많지 않다. 영국은 왕립감정사협회 소속 감정사만 3만2000명에 달한다. 최명윤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미술품을 문화유산이 아닌 재산증식 수단으로만 보는 화랑 주인, 소장자, 위조범이 삼위일체가 되어 한국 미술시장을 위작판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