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흑 분패(憤敗)

〈제14보〉(211~250)=조남철이 한국 바둑계의 개척자였고 김인이 그 계승자였다면, 조훈현은 우리 바둑의 개화(開花)를 몇 걸음 앞당긴 소중한 주역이었다. 천부의 재능에 더해 일본 유학까지 거친 그가 독보적 실력을 풀어놓으면서 한국은 눈부신 도약을 계속했다. 그는 여기에다 이창호란 불세출의 제자까지 키워내 적통(嫡統)을 계승시켰다. 조훈현만큼 복 받은 바둑인이 앞으로 또 출현할 수 있을까.

바둑은 이미 저물었다. 천리 길을 달려온 기관차처럼 마지막 종착역을 향해 헐떡이며 달려가고 있다. 225는 연결해간 수. 231에서 마지막으로 ‘나이 먹는 서글픔’을 본다. 참고도 1에 비해서 1집 손해. A의 절단이 있어 응수가 불가피하지만 흑 1로 한 집을 내면서 해결할 수 있다. 젊은 날 조훈현의 바둑에선 이런 실수는 결코 볼 수 없었다.

250수로 종국(終局). 구획 정리를 마치고 보니 흑이 반면(盤面) 4집을 남겼다. 백의 2집 반 승. 돌을 쓸어 담는 조훈현의 표정이 화난 듯, 슬픈 듯 복잡하다. 이런 경우엔 복기(復棋)도 없다. 함께 시작한 2회전 8국 중 가장 늦게 끝난 바둑. 55세 노장이 휘청이며 대국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