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바둑계에도 뽀송뽀송한 10대 돌풍

가지런히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 솜털 보송보송한 뽀얀 이마가 드러나고 그 아래 안경 너머 두 눈이 티 없이 맑다.

1993년 1월 10일생, 14세 소년 박정환(프로2단·충암중 2년)이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프로바둑 ‘2007 엠게임 마스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마스터스 챔피언십 우승상금은 2500만원. 40대 이상의 프로들이 출전하지 않는 제한기전이지만 최강의 세대 10~30대 정예들이 모두 출전하는, 메이저 기전 이상의 공식기전이다.

거의 모든 신문에 소년의 우승소식이 실리고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언론의 흥분은 당연하다. 박정환의 14세 우승기록(생후 14년 10개월 4일)은 세계바둑의 ‘지존’ 이창호 9단의 기록(1989년 8월 8일 KBS바둑왕전 우승· 생후 14년 10일)에 밀려 2위에 그쳤지만 약 20년 만에 재현된 진기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입단 1년 6개월 만의 우승은 역대 최고기록(1972년 서봉수 2단 명인 획득, 입단 1년 9개월)을 3개월 앞당긴 신기록이다. 2단 우승은 역대 최저단 우승(1972년 명인전 서봉수 2단· 2001년 천원전 박영훈 2단) 타이기록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년의 우승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놀라운 관심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바둑을 고고한 정신의 승부라고 생각해온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시선은 같은 순간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바둑은 10대에 봉오리를 맺어 20대 초반에 활짝 피어나는 육체 스포츠와는 격이 다른 세계”라고 믿어왔다. 나이 30을 넘겨 숙련의 경지에 이르고 40, 50대의 연륜을 쌓은 뒤 비로소 승부의 그윽함을 관조(觀照)하는 눈을 갖게 되는 세계라고 믿었던 것이다.

누천년(累千年)의 여정을 가진 정신의 승부에 10대 챔피언이라니, 도대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의문은 이미 15년 전 이창호의 세계대회 우승에 즈음해서 제기됐다. 1993년 제4회 동양증권배 결승을 앞둔 조치훈 9단은 이창호의 스승 조훈현 9단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바둑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우리(조훈현과 조치훈)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30~40년 힘들게 수련해야 겨우 터득하는 것을 이창호는 희한하게 벌써 터득했다.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우리가 보여줘야 한다. 하나하나 단계를 밟으면서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야 정상인데, 그런 고생을 해야 진짜인데, 이창호의 바둑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지면 안 된다. 이창호를 위해서도 우리가 이겨줘야 한다.”

조치훈은 결승에서 만난 19년 연하의 이창호에게 ‘앞서 걸어온 사람의 연륜 같은 것’을 보여주려 했으나 0대3으로 완패했다. 이창호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간절한 그 무엇’을 보여주는 데 실패한 조치훈이 씁쓸히 일본으로 돌아설 때 조훈현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 무렵 어린 제자와 타이틀 전선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조훈현은, 조치훈이 미처 알지 못한 ‘시대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0대 소년의 우승이 바둑계 바깥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일지 몰라도 바둑계 안쪽을 들여다보면 결코 이변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이창호의 뒤를 이어 세계최강자로 떠오른 이세돌 9단도 10대에 타이틀 홀더가 됐다. 박정환과 마스터스 챔피언십 우승을 다툰 김지석 4단(18), 제4기 전자랜드 왕중왕전 결승에서 이창호를 밀어낸 강동윤 7단(18), 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진출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겁 없는 초단’ 한상훈(19)도 모두 10대 기사들이다.

10대 스타의 출현은 사회현상이다. 초고속 인터넷 등 다양한 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인터넷, TV 속기전(速棋戰)으로 무게중심을 이동 중인 현대바둑의 흐름이 집중력, 순발력 싸움에서 유리한 소년기의 강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찌감치 바둑을 스포츠로 받아들인 중국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바둑은 조훈현 9단과 응씨배를 놓고 천하의 패권을 다툰 녜웨이핑 9단, 1995년에 잠시 세계최강에 올랐던 마샤오춘 9단(95년 동양증권배·후지쯔배 우승)이 급격하게 무너진 이후 눈부신 진화를 거듭해왔다.

이창호 9단과 세계무대에서 우정의 라이벌전을 펼친 창하오 9단(31)은 속기천재 뤄시허 9단(30)과 함께 ‘소룡(少龍)세대’를 이끌며 치열한 한·중 라이벌 시대를 열었고 그 뒤를 이은 구리 9단(24)과 쿵제 9단(25)의 ‘소호(少虎)세대’가 드디어 한국의 20년 무적시대를 저지했다(2005년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2006년 CSK배 단체전· 춘란배 우승).

현재 중국바둑의 중심축인 구리, 쿵제 등은 이세돌 9단(24), 조한승 9단(25)과 동갑내기로 조훈현-녜웨이핑, 이창호-창하오로 이어진 한·중 정상 라이벌전까지 대물림했다. 최근에는 한국의 압도적 우위가 백중지세의 치열한 공방으로 바뀌고 있다.

중국바둑은 여러 면에서 한국바둑과 닮은꼴이다. 한국은 전국 1천여 곳의 바둑교실과 프로가 운영하는 바둑도장에서 전문기사 후보군이 양성되고 이들이 한국기원 연구생제도를 거쳐 프로가 되는데 그 치열한 집단경쟁의 과정에서 입단하자마자 정상을 노리는 ‘괴물 10대’가 만들어진다.

중국은 행정자치구역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바둑 집단훈련대가 있는데 이곳의 역할이 한국의 바둑교실, 바둑도장과 유사하다. 최근에는 중국기원이 직접 감독을 선임하고 체계적인 집단훈련으로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프로그램을 채용해 국제대회 단체-개인전 우승을 휩쓰는 성과를 올렸다.

한국바둑의 독특한 구조와 집단연구 시스템이 한상훈, 강동윤, 김지석, 박정환 같은 10대 스타를 배출했다면 중국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소호세대’를 잇는 ‘소표(少豹)세대’를 만들어냈다.

제10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천야오예(18)가 ‘소표세대’의 선두주자인데 전국대회 우승 경력을 가진 리저 6단(18), 구링이 5단(17), 저우루이양 5단(17) 등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어 이들 10대 스타들의 한·중 라이벌전은 그 어느 세대보다 치열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