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참을 만큼 참았다, 붙자 그냥

‘사랑’이 뇌의 호르몬 때문에 일어나는 두뇌의 ‘화학적 작용’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불현듯 발생하는 가슴 떨림 작용까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유효기간 설(說)이야 그렇다 치고,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 뒤 북받쳐 오르는 상대에 대한 증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애증의 깊이는 어떻게 잴 것인가.

여기 두 남녀가 있다. 사랑할 때는 예쁘기 그지 없었던 상대지만, 이별을 고하고 나니 세상 모든 저주를 가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골치가 지끈한데, 이 ‘웬수’ 역할에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배우들이 나섰다.

‘국가대표 터프남’으로 형사 혹은 운동선수, 범죄자로 능수능란하게 변신했던 설경구와, CF만으로도 십 수년은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 자체 발광 ‘국가대표 꽃미녀’ 김태희가 그 주인공. 언뜻 ‘아저씨와 조카’로 보이는 둘의 조합도 그렇거니와, 평소 이미지와 반대되는 역할을 해낸다고 하니, 이래 저래 작심하고 ‘도전’을 한 듯싶다. 설경구 말마따나 ‘선입견으로 보면 정말 부조화’인 커플이 13일 ‘싸움’이라는 타이틀로 스크린에 나선다.

지난해 드라마 ‘연애시대’로 남녀간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내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한지승 감독이 2000년 ‘하루’를 내 놓은 이후 7년 만에 영화관에 내 건 작품이다. 밑바닥 감정 끌어내기가 장점인 한지승 감독이 ‘싸움’을 얼마나 처절하게 그렸을 지 기대를 모은다. 13년 전 ‘마누라 죽이기’가 결혼 뒤 시들해진 부부들의 과격한 일탈을 그렸다면, 이번 영화 ‘싸움’은 업그레이드 판 ‘남편 죽이기’ 꼴이다. 물론 그 구타유발 행위는 남자에게서 비롯되긴 하지만 말이다. 또 서로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점에서 할리우드 최고 커플인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킬러 부부로 열연했던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싸움유발자’와 ‘싸움행동자’와의 대결이라는 설명처럼, 설경구가 연기하는 ‘예민결벽 과다집착형 새가슴증후군’ 곤충학자 김상민은 찌질이 중에 찌질이과(科)다. 무심한데다 소심하기 짝이 없다. 연필도 길이가 딱 맞춰지지 않으면 불안하다. 거기에 자기 밖에 모르고, 자신을 위해 타인이 희생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이 원하는 그 한가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주기’ 따위는 머리 속 어느 한 구석에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최악’의 남자가 여자랑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콩깍지’ 이외의 단어는 찾을 수 없다.

‘대표 까칠녀’ 유리 공예가 윤진아(김태희)는 할 말이 많다. 헤어지고 났으면 깔끔하게 손 털 것이지, 도대체 자신의 물건을 되돌려 달라는 그 남자의 심보는 무엇인가. 하는 말 족족 속을 긁는 데 ‘초초초’ 다혈질 그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이킥을 날려서라도 분을 풀어야 하니까.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서 표독스러운 연기를 선보이긴 했지만, 주로 청순하거나 신비하거나 연약하거나 하는 등 전형적인 여성상을 그려왔던 김태희. 이번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악다구니를 쓴다. 이미지 변신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 육상 선수로 뽑혔을 정도로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이런 역할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기존에 보여줬던 나풀나풀한 이미지의 ‘공주’가 이번 영화로 얼마나 망가지는지도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