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이 뽑은 겨울이 사랑한 무비] ‘냉혹함’의 미학

영화를 본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킬빌’을 보러 극장에 들어갔을 때 바깥 날씨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우마 서먼이 긴 칼을 내리꽂고 있는 포스터를 떠올리면 뜨거운 여름이거나 꽃 피는 봄날, 뜻밖에 가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바깥 날씨야 어쨌든, ‘킬빌’은 매서운 한겨울 추위와 마주선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은 전적으로 브라이드(우마 서먼)와 흰 기모노 차림의 오렌 이시(루시 리우)가 눈 내리는 일본식 정원에서 칼을 들고 마주하는 장면 때문일 것이다. 오렌을 죽이기 위해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브라이드가 검은 문살의 미닫이문을 열자, 그림처럼 아름답게 눈이 내리고 있는 마당이 나타난다.

그 장면이 있기 전 그녀는 무계절의 공간인 댄스홀과 다다미 방에서 검은 양복 입은 수십 명 사내들과의 결투를 이제 막 이겨낸 참이었다. 문안에서는 피와 땀이 흐르고 문밖에서는 눈이 내리는 그 장면은 갑자기 찾아오는 겨울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서운 겨울은 긴 회랑을 지나는 것처럼 서서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단숨에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법이다.

두 여자가 사무라이 검을 날릴 때 의좋은 자매들이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눈이 흩날렸다. 마주 댄 칼만 아니라면 눈 오는 밤 정원을 산책하는 자매들로 보일 정도였다. 그녀들은 칼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원무를 하듯 서서히 둥글게 마당을 돌았다. 언제까지 돌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이내 서로의 가슴에 칼을 그어댔다. 어떤 것은 가슴을 스치고 어떤 것은 허공을 가르고 어떤 것은 서로의 칼끼리 맞닿아 챙 하는 소리를 냈다. 또 언제까지나 누구든 죽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흰 기모노를 입은 오렌이 붉은 핏물을 흰 눈밭에 꽃처럼 뚝, 뚝, 흘리며 쓰러졌다.

나는 총보다는 칼을 쓰는 영화를 좋아한다. 총은 죽고 죽이는 와중에 기물을 파괴하여 너무 시끄럽게 군다. 총을 든 사람들은 자주 경솔하여 아무나 죽이거나 누군가를 죽이지 못한다.

그에 비해 칼은 여러 번 휘둘러야 제대로 맞을까 말까 하므로 총에 비해 신중하다. 게다가 고수라면 단칼에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다. 그걸 즐기려면 물론 노골적으로 피가 튀고 간혹 사지가 절단되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긴 칼을 찬 검객이라면 단칼에, 상대가 말을 남길 틈을 주지 말고 동정 없이 내리쳐야 한다. 피가 옷을 붉게 물들이고, 내장이 튀고, 그게 칼을 휘두른 검객의 얼굴과 옷을 더럽히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칼을 찬 검객의 예의이다. 가지고 놀려고 괜히 불편하게 긴 칼을 차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검객의 세계관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킬빌의 세계이고, 브라이드의 세계이고, 내가 공감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동정이 없기 때문에 서늘하고, 위로가 없기 때문에 잔혹하다. 바로 그 때문에 현실적이다.

사실 ‘킬빌’은 겨울 추위를 위로하거나 스산한 마음을 쓰다듬거나 허무하게 보내버린 한 해를 위무하려고 손을 잡아주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어쩌면 겨울에 대해서 혹은 위로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이 영화는, 눈 쌓인 일본식 정원에서의 결투 장면을 통해 위로나 동정을 기대하는 대신 겨울을, 추위를, 두려움을 칼날처럼 벼린 눈으로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고 얘기한다.

곧 눈이 오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시린 바람이 불어 칼처럼 매서운 추위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동정이나 위로를 기대하는 대신, 긴 칼을 옆구리에 찬 심정으로 당당해질 일이다. 너무 많은 상황에서 수시로 누군가의 위로와 동정을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서늘한 칼의 느낌도, 추운 겨울도 견딜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