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쌀한 사랑의 만화경 ‘러브 액츄얼리’

먼저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에 실린 동물 우화 한 편. 겨울을 대비해 다른 친구들이 옥수수와 호두를 모아나갈 때, 작은 쥐 프레데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는 왜 우리처럼 일을 하지 않는 거니?” 프레데릭이 대답했다. “난 지금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볕을 모으고 있어.” 이를테면, 영화는 겨울에 프레데릭이 친구들을 위해 풀어놓는 따사로운 햇볕 같은 게 아닐까. 로맨틱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아스라한 제야의 종소리, 그리고 잠 못 드는 길고 긴 겨울밤으로 채워진 계절. 많은 영화들이 겨울을 사랑했다.

‘눈이 쏟아지는 광경’을 키워드로 머릿 속에 입력하면, 조건반사처럼 제일 먼저 ‘러브 레터’의 일본 오타루 풍경이 눈 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애인 후지이 이츠키의 2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던 와타나베 히로코는 그의 중학 시절 앨범에서 주소를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 주소는 애인의 중학 시절 동창생으로 이름이 똑같았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것. 후지이 이츠키는 히로코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오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낸다.

팬층이 두터운 일본 감독 이와이 ?지의 이 대표작에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흘러갔던 첫사랑, 저편 세상으로 떠나버린 연인에게 목놓아 전하는 안부, 그리고 한 남자를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두 여자의 교감이 아름답게 아로새겨져 있다. 실제 가본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는 적설량이 엄청난 아름다운 소도시였다. 치쌓인 눈 사이로 난 길을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비현실적인 감각 때문에 겨울이 환(幻)의 계절임을 절감하게 된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아마도 ‘러브 액츄얼리’가 아닐까. 리처드 커티스의 이 연출 데뷔작은 영국 런던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갖가지 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평범한 배경과 외모의 비서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영국 수상의 이야기처럼 예쁜 삽화가 들어 있는가 하면, 심각한 질환을 앓는 가족을 돌보느라 간신히 찾아온 사랑의 기회를 떠나보내야 하는 여자의 이야기처럼 쓸쓸한 에피소드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국 삽입곡 ‘Love is all around’가 뜻하듯 ‘어디에나 있는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작품이다.

그러나 아무리 영화가 로맨틱해도, 런던이나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은 하지 말 것. 서구의 크리스마스는 가족이 함께 쉬는 축제일이기 때문. 그 무렵 ‘러브 액츄얼리’의 무대인 런던을 찾았다가,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는 바람에 걷고 또 걸었던 경험이 생생하다. 그때 크리스마스 점심 메뉴는 햄버거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리는 눈이라고 언제나 서설(瑞雪)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감독 자크 드미의 고전 ‘쉘부르의 우산’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은 어긋난 인연과 무심한 세월에 대한 회한을 가득 품은 채 소리 없이 내린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징집된 애인 기와 소식이 끊기는 바람에 그와의 사이에서 갖게 된 아기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한 주느비에브. 그리고 뒤늦게 돌아와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크리스마스 이브, 기가 운영하는 주유소에 우연히 주느비에브가 나타난다. 내뱉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짧은 대화 끝에 관객은 주느비에브의 딸 이름이 프랑수아즈이고 기의 아들 이름이 프랑수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에 불타던 시절, 둘은 나중에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프랑수아라고 짓기로 했었다.

모든 대사를 노래에 담아 전하는 이 뮤지컬은 건물 벽에서 우산까지, 화사한 색감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노란 레인코트를 입고 빨간 우산을 쓴 채 걷던 스물한살의 카트린느 드뇌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겨울에 찾았던 북프랑스 항구 도시 쉘부르는 영화 속 모습과 달리 스산하기만 했다. 추억이라도 만들려고 미셸 르그랑이 담당했던 너무나 유명한 사운드트랙 음반을 사려고 했지만 구할 수 없었고, 색색으로 화려한 우산가게를 찾았지만 검은색 우산 몇 개만 플라스틱 통에 꽂아놓은 편의점를 발견했을 뿐이었다.

낭만적인 사랑 영화의 탄생지를 찾아가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암탉의 배를 갈라보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을까. 하지만 닭의 배를 가른 뒤에도 이 세 작품의 낭만적 풍광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쯤 되면 겨울이 사랑하는 영화들이라고 찬사를 바쳐도 호들갑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