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촉촉한 시선] 작가 정신의 과잉

봉준호 감독 데뷔 시절 일화 하나. 첫 작품인 이성재·배두나 주연의 ‘플란다스의 개’(2000)를 준비하던 이 야심만만한 신인은 호언장담했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온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고. 물론 세상은 끄떡없었고, 미학적 야심에 불타던 청년 감독은 쓰라린 흥행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가 전략을 바꾼 것은 그 다음부터. “아, 일단은 손님을 버스에 태워야 하는구나. 장르의 외피를 분명하게 만들지 않으면, 대중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구나. 내가 데려가고 싶은 곳은 왕십리지만, 일단 청량리행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야겠다.” 이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스릴러인 줄 알고 올라 탔던 ‘살인의 추억’(2003)에서 범인은 결국 잡히지 않았고, 괴수의 종횡무진을 기대했던 ‘괴물’(2006)은 이 장르 사상 괴물이 가장 쩨쩨하게 나온 영화로 꼽힌다. 그는 장르를 배신했지만 많은 관객을 설득시켰고, 감독 봉준호는 흥행과 비평 양쪽 월계관 모두의 주인공이 됐다.

봉 감독의 에피소드를 길게 인용한 것은 최근 있었던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들의 한 포럼 때문이다. ‘최근 한국영화 서사의 어떤 경향’이라는 추상적 제목의 행사였는데, 이야기의 한 갈래는 소위 감독의 작가주의적 야심을 품은 작품들이 흥행에서 족족 고꾸라지는 최근의 현실로 흘러갔다.

모든 영화감독들의 꿈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흥행에서도 성공하는 것. 봉준호 등 몇몇 탁월한 감독의 성공 이후, 비슷한 야망을 지닌 감독들이 선택한 전략 중 하나는 ‘장르의 배반’이다. “특정 장르의 외피를 쓰고 관객을 호객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장르를 거부하는 것은 2000년 이후 최근 감독들의 일치된 욕망으로 보인다”(김영진 명지대 교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품의 흥행 부진 책임이 과연 관객에게만 물을 문제냐는 것. 삶을 질문하는 영화에 대한 참을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의미보다 재미를 우선하는 요즘 현대 관객의 취향에도 분명 섭섭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깊이와 밀도에서 감독들이 작품 내적으로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와 연출을 만들어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포럼은 또 허진호와 이명세의 최근작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일상의 대지에 단단하게 발을 붙인 채 남녀의 사랑을 새겨 넣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와 이번 ‘행복’의 차이에 대해, 또 사라진 옛 이발소 공간이나 추억의 골목길 같은 공간을 묘사할 때의 출중했던 이명세와 이번 ‘M’에서 느꼈던 아쉬움에 대하여 말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 미학적 성취를 인정 받은 이 중견 감독들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아직 경험과 재능이 일천한 많은 젊은 감독들마저 이런 ‘작가주의 과잉’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다. ‘행복’에는 이런 멋진 대사가 있다. 술도, 유흥도 없는 시골의 요양원 생활에 짜증내는 황정민에게 지나가던 노인이 한 마디를 툭 던진다. “원래 몸에 좋은 게 재미는 없지”. 그런데 거꾸로, 재미없는 일들이면 무조건 다 몸에 좋은 걸까. 진정성만 있으면 모든 게 다 용서될까. 진정한 진정성은 진심과 재능이 합쳐졌을 때 공감할 수 있는 법이다. 미학적 야심에 불타는 많은 감독들이 한번 쯤 더 고민해 주기를 앙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