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소리꾼 ‘이자람’이 옛날 그 꼬마 ‘예솔이’?

지난 2일 정동극장에서 열린 창작판소리 ‘사천가’. ‘소리꾼’ 이자람(29)은 한복 치마에 검은 재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합을 의상으로 구현한 것. ‘판소리의 현대화’를 표방하고 만든 작품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시각적인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4세 때 아버지 이규대씨와 함께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를 부르던 그 꼬마. 앙증맞은 얼굴로 ‘네~’하고 달려가던 예솔이가 내년이면 꽉 찬 서른이 된다. 그는 초등학교 때 판소리를 배우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소리의 매력에 끌려 국악의 길을 택했다. 주말이면 포크록 그룹 ‘아마도 이자람밴드’의 보컬로 홍대 클럽에 서고, 라디오 방송 DJ, 기타리스트 등을 두루 거친 ‘전방위 예술가’다. 그는 지금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실험을 하는 중이다.

무대 위에서 그는 시시각각 변신했다. 눈빛과 몸짓, 창법과 장단의 변화만으로 ‘1인 다역(多役)’을 너끈히 소화했다. 진양조의 느린 장단으로 착한 여주인공 순덕을 노래했다가 탐욕스런 뺑부인으로 변신할 때는 타령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며 요염한 눈빛을 흘렸다. 그의 소리와 연기에 압도된 객석에선 수시로 “얼쑤!”라는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사흘간의 공연을 끝낸 다음 날 밤, 홍대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새벽 6시까지 뒤풀이 하느라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다”는 그가 반달 눈으로 기자를 맞았다.

“제 이름 석자를 내건 첫 창작판소리극인데, 결과에 만족해요. 100점 만점에 75점? 너무 후한가요?(웃음) 어차피 길게 갈 작품이니까, 부족한 부분은 계속 고쳐가야죠.”

지난달 30일 열린 첫 공연은 초대권 관객이 50%였지만, 1~2일 주말 공연엔 객석이 꽉 찼고 70% 이상이 유료 관객이었다. 흥행 면에선 일단 성공인 셈이다.

‘사천가’는 ‘이자람의, 이자람에 의한 실험극’이다. 그가 직접 대본을 썼고, 작창(作唱), 배우, 음악감독까지 1인 4역을 맡았다. 소리꾼 혼자 북 장단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가는 판소리와 달리 그는 이 작품에 연극적 요소를 가미했다. 광대 3명이 등장해 극의 진행을 돕고, 베이스, 양금, 타악기 등을 간간이 넣어 소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원작은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으로 유명한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들’. 그는 배경을 21세기 대한민국 서울로 옮겨왔다. 2월에 연출자를 만나 작품을 정하고, 원작을 3번 정독한 뒤 본능적으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본을 쓰는 데만 7개월을 쏟아부었죠. 서양극작법 수업을 청강하면서 내공을 키웠지만, 어렵고 막막했어요. 서양 극작과 판소리 극작이 다른 데다 판소리에는 ‘판소리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체계가 있거든요.”

9월에 3시간짜리 1차 대본이 나왔고, 작창을 하며 다시 2시간 분량으로 압축했다. 그는 “악보랑 안 친해서 MP3로 녹음해 들으면서 작업했다”며 “녹음 파일만 300개가 넘는다”고 했다. ‘사천가’는 그렇게 소리꾼 이자람의 ‘본능적 감각’과 ‘노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왜 스승들이 걷지 않은 길을 굳이 힘들게 찾아갈까. 그가 또박또박 답한다.

“현재의 판소리는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명맥을 지켜오고 있긴 하지만, ‘지켜지기 위해’ 정형화돼 있을 뿐 공감을 얻지 못하잖아요. 판소리가 사랑받았던 시절 우리들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었던 것처럼, 음악뿐이 아닌 이야기로, 걸쭉한 놀이판으로 살아 숨쉬어야 해요.”

보수적인 판소리계에선 그의 이런 실험을 어떻게 볼까. 그는 “선생님은 저 이 공연 한 거 모르세요”라며 또 반달 눈으로 웃었다. 그의 스승은 동초제의 대모인 오정숙 명창이다. “처음엔 반대하셨는데, 이젠 ‘그래, 할 건 하면서 해라’라고 하세요. 제가 전통 판소리를 계속할 거라는 걸 믿으시니까요.”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수료한 그는 고등학생이던 1997년 최연소로 4시간에 걸쳐 ‘심청가’를 완창했고, 2년 뒤에는 8시간에 걸쳐 ‘춘향가’를 완창, ‘최장 시간 완창’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촉망받는 국악인으로서의 ‘필수 과정’을 거친 셈이다.

그는 “2002년 국악뮤지컬 창작집단 ‘타루’를 만들어서 5년간 활동했는데, 새로운 걸 시도하고 나면 꼭 다시 전통을 갈급하게 된다”며 “작년에 타루를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오정숙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년간 준비해 지난 5월 ‘수궁가’를 완창했다.

이 젊고 의욕적인 소리꾼은 내년 상반기까지 계획이 꽉 차 있다. 5월엔 국제현대무용제에 출품되는 안무가 박영준 작품에 무용수로 서고, 8월엔 독일에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각색한 창작판소리 ‘마탄의 사수가’를 올릴 예정이다. “판소리는 제 삶의 기저예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이죠. 제가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 다른 예술활동을 하며 경험한 모든 것들이 판소리에는 정직하게 녹아나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