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장에선 열기 대신 온기가…

‘오빠부대’들을 끌고 다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독주회에서 마주칠 법한 뜨거운 환호성이나 카메라 플래시 세례는 없었다. 지난 8일부터 1주일간 8차례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대장정’에 들어간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리사이틀에는 급하게 끓어오르는 열기 대신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넥타이 대신 편안한 흰색 라운드 티 차림으로 등장한 백건우는 천천히 90도로 고개 숙여 객석을 향해 인사한 뒤 악보를 넘기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와 미소를 주고 받았다.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8일 연주회의 마지막 곡인 피아노 소나타 3번 1악장에서 백건우의 건반이 폭발할 것처럼 끝나자 객석에서는 서둘러 악장 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백건우는 잠시 후 숨막힐 듯한 적막감으로 2악장을 그려냈다. 때로는 음표 못지않게 쉼표도 중요하다는 걸 그의 느린 템포가 일러주고 있었다.

베토벤의 소나타에서는 초기 곡에서도 어른스러움이 묻어 나오고, 후기작에서도 때때로 어린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 나온다. 백건우는 서로 다른 등정 코스가 있을 뿐 등산의 목적지는 언제나 하나라는 것을 일러주듯이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베토벤의 소나타를 그려냈다.

힘과 서정성이 3악장 내내 서로 빈틈 없이 균형을 맞춘 피아노 소나타 5번에서 첫날 연주회는 정점을 찍었다. 명확한 강약의 대비를 통해 곡이 지니고 있는 스케일을 확장시키는 백건우의 트레이드 마크는 베토벤 소나타와 정확히 맞물렸다.

토요일 한 차례, 일요일 낮과 저녁 두 차례의 ‘주말 강행군’과 함께 7일간 8차례의 베토벤 순례는 시작됐다. 마지막 리사이틀까지 이미 네 차례 콘서트가 매진을 이뤘고, 때맞춰 출시된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은 한정판 3000장이 동날 정도로 커다란 ‘경제적 파급 효과’를 낳고 있다.

1주일 연속 연주회, 총 좌석 2만여석, 전체 연주회 사전 예매 800명(6400석)이라는 기록들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베토벤)를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피아니스트(백건우)가 빚어내고 있기에 가능한 듯했다. 첫날 연주를 마친 뒤에도 백건우는 30여 분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복도에서 장사진(長蛇陣)을 이룬 팬들의 사인 요청에 일일이 답했다.

마치 강의라도 듣는 것처럼 콘서트가 끝난 뒤 티켓 매표소에서 다시 줄을 서서 프로그램 책자 뒤편에 ‘출석 도장’을 받는 장면은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주최인 크레디아측은 8차례의 연주회에 모두 참석한 팬들에게 공연 캘린더를 선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