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재미 과학자 프로기사 랭킹 손본다

저명한 재미(在美) 과학자가 한국 프로기사 랭킹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현재 스탠퍼드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태양활동 연구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배태일(63·사진) 박사가 그 주인공. 배 박사는 최근 관련 논문과 2007년판 종합 랭킹을 조선일보 및 한국바둑학회에 보내왔다.

배 박사의 랭킹 산정법은 풍부한 통계학적 지식과 함께 일로(Elo)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방식과 차별점을 갖는다. 일로 시스템은 역시 물리학 교수이자 체스 전문가였던 고 일로(Arpad Elo) 박사가 1959년 미국 체스연맹의 의뢰를 받아 개발한 방식. 이 시스템은 현재 세계체스연맹, 미국바둑협회, 미국탁구협회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을 만큼 보편화돼 있다. 단순한 순위 나열에 그치지 않고 매 단위기간별 역동적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상대한 선수의 점수를 고려해 제한기전까지도 모두 계산에 넣는다. 심지어 각자의 랭킹점수로 특정 기사 2명 간의 승패비율 예측까지 하는 장점도 있다.

배 박사는 예선전 1, 본선 대국 1.5, 결승전 및 도전기엔 2의 가중치를 주었다. 또 1~10위권 기사, 11~20위권 기사, 외국 기사와의 전적 등을 모두 별도 구분했다. 하루 3국을 소화한 속기전의 승패는 한 판으로 계산하고, 1년 간 5국 미만 대국자 및 전패자의 전적은 집계에서 제외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된 2007년 국내 프로들의 랭킹은 별표와 같다.

이세돌의 경우 외국 기사 상대 13승 3패, 국내 26위 이하 기사 상대 30승 2패란 화려한 전적이 큰 점수차로 1위에 오른 원동력이 됐다. 이창호가 2위에 오른 한국기원 랭킹과 달리 배 박사 랭킹의 2위는 박영훈. 그러나 배 박사에 따르면 2위부터 6위, 또 7위부터 10위까지의 기사들은 통계적으로 거의 같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 근접해 있다. 강동윤은 전체 승률과 상위 3그룹 상대 성적이 모두 뛰어나 3위로 점프한 것으로 분석했다. 허영호의 경우 한국기원 랭킹은 10전 전승 우승한 마스터즈배와 신예기전 준우승 등이 제한기전으로 빠지는 바람에 20위에 머물렀다.

배태일 박사의 논문과 2007년 랭킹 작업과정을 살펴본 국내 관계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다.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는 "랭킹 작업은 통계나 수학의 영역이므로 당연히 이런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한국기원에 자문역으로 정식 위촉할 것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랭킹위원 중 한 명인 김만수 七단도 "공신력 있는 여러 단체에서 검증된 선진 기법으로 옮겨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로기사들과 가중치 등 몇 가지 면에서 조율을 거치면 완벽한 방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1972년 도미 유학을 떠난 배 박사는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미 항공우주국(NASA), 고다드 우주비행 연구소, 캘리포니아 대학 등에 재직하며 천문물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태양 플래어(flare) 현상에 대해 세계적 권위를 자랑한다. 바둑은 69년 한국기원서 아마 3단, 72년 미국바둑협회 주관 대회에 출전해 아마 5단을 받은 실력. 79년부터 샌디에이고에서 바둑클럽을 조직해 랭킹제를 운용했을 정도로 바둑에 애정이 깊다. 연말 연시 휴일을 꼬박 이번 랭킹 작업에 할애, 완성된 자료를 보내온 그는 "한국바둑계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