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 대본 베껴쓰며 내 안에 숨은 얼굴 찾아냈다"

이제 겨우 1월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지만 충무로는 올해 연말 영화제 시상식에서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 한 명을 얻었다. 역대 최고령 후보임에 분명할 이 노배우의 이름은 변희봉(67)이다. 스릴러 '더 게임'(1월 31일 개봉)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1인 2역. 전반부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젊어지겠다는 노욕(老慾)의 금융 재벌 강노식, 후반부는 늙은 강노식의 껍데기를 쓰고 살아야 하는 비운의 청년 민희도다.

뇌와 척수를 이식하는 비밀 외과수술로 창조된 이 전무후무한 캐릭터에서 20대와 70대를 가로지르는 변희봉의 연기는 그 자체로 전율을 일으킨다. 도박에서 승리한 뒤 젊은 민희도(신하균)의 싱싱한 육체를 바라보며 "이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차례인가"라고 말할 때의 탐욕스러운 카리스마. 뇌를 바꿔치기 당한 뒤 "몸을 빼앗겼어요"라고 울분 토할 때의 처연함과 분노. 여기에 늙어 돌아온 조카를 반신반의하는 삼촌(손현주)을 대할 때의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로 스크린 복귀한 뒤 '살인의 추억'(2003·수사반장) '공공의 적2'(2005·사립고교 이사) '괴물'(2006·매점 할아버지) 등 출연 영화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조연으로 관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배우지만 이번 '더 게임'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그 자체로 절정이다.

펑펑 눈이 쏟아지는 삼청동에서, 아직 뇌수술 장면 촬영 때의 삭발 흔적이 남아 있는 노배우는 꼿꼿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며 시종일관 겸양하면서도 '배우로서의 자존심과 성실성' 대목에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1965년 MBC 라디오 성우 공채 2기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이래 그가 포기하지 않는 첫 번째 원칙은 시나리오 베껴 쓰기. 그는 "대본이 나올 때 마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과 대사를 하얀 백지에 연필로 필사한다"면서 "쓰는 동안 100번도 넘게 캐릭터를 가지고 놀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 두 번째는 집이 아니라 길에서 연습을 한다는 것. 베껴 쓴 종이꾸러미를 들고 동네 뒷산을 찾는다. "남이 보면 완전히 미친 놈이죠. 마스크 쓰고 산 바위 틈에 쭈그리고 앉아 소리를 질러대니까. 하지만 집에서 연습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훨씬 더 구체적으로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플러스 알파가 두 개, 세 개는 더 생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