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 기자의 시네마 핫!] '우생순'이 보여준 진짜 가치

4년 전 이맘때였다. 핸드볼 큰 잔치 경기를 취재하려 왔건만 눈에 띈 건 썰렁한 관중석 한 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선수의 얼굴이었다. "저도 당장 내려가 뛰고 싶은데…." 국가 대표팀의 '주포'(主砲)인 이상은이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창 뛰어야 할 때 그녀는 갑작스러운 소속 팀 해체로 관중석을 지켜야 했다.

얼마 전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을 보는 동안 그녀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실업팀 해체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화 초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는 대표팀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언니들'인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에 주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지만 그럴수록 이상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 속 정란(김지영)과 보람(민지)의 캐릭터를 섞어 놓은 듯한 그녀는 '현실 속 돌아온 언니들'(임오경, 오성옥)과 함께 본선 무대를 쉼 없이 누비고, 영화에서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명이 더 있다. 핸드볼협회 고병훈 사무국장이다.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뒤 몇달 동안 대회 후원사를 잡지 못해 애태우다 한 업체와 1억원이라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의 후원 계약을 따내고선 그는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2004 아테네올림픽 우승 문턱에서 안타깝게 무릎을 꿇은 여자 핸드볼 대표팀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우생순'은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임순례 감독의 우직함도 힘이 됐지만 밑바닥까지 좌절을 맛봤던 실제 주인공들의 사연은 영화의 진정성과 현실감을 지탱해주는 뿌리가 된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이런 '황금 소재'는 책상 머리 상상으론 쉽게 그려내기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힘 있는 악당'까지 존재한다. 당시 결승전 상대였던 덴마크는 클럽팀만 1000여개에 연중 9000여회 경기가 열리는 곳이며, 선수들은 '할리우드 스타' 못지 않은 대접을 받는다. 있는 팀마저 해체되고 10년차 선수 연봉이 3000만원 안팎인 우리와 비교하면 전혀 딴 세상 얘기 같다.

그런데 약간의 과장을 보태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을 그려놓은 '우생순' 속 한국의 현실은 왠지 최근 영화시장과 비슷해 보인다. 막대한 자본과 유명 스타들로 중무장한 할리우드의 위세에 그야말로 '있는 팀마저 해체될'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안다. 거대 '괴물'들에게 한 방 먹인 '핸드볼 아줌마'들처럼 '진정성'이 담긴 우리 정서에 맞는 작품들을 들고 나온다면 기꺼이 돈 주고 볼 의향이 있다는 것을. 체력 열세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과 스피드, 투지로 승부하는 '한국식 해법'으로 승부수를 던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핸드볼 선수들처럼 '밑바닥 헝그리정신'과 '겸손함'으로 중무장해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