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한량 역할 제대로 해낸 내가 기특할 뿐"

굽슬굽슬한 머리는 정수리를 기준으로 가르마가 양쪽으로 곱게 나 있었다. 흘러내려오는 머리칼을 귀 뒤로 살짝 넘기더니 그는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예수 닮았대요. 정말 최고의 찬사, 진짜 감동 아닌가요?"라며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류승범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후의 이미지가 아닐까? 신앙심 깊고, 편안하고, 여유로 가득한 모습 말이다. 그가 영화 '라듸오 데이즈'(31일 개봉)에서는 일제 치하 암울한 세상에서 한 발 뗀 엘리트 한량 PD 로이드로 변신해 가장 '류승범스럽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고삐리 불량영웅'(품행제로·2002), '양아치 복서'(주먹이 운다·2005), '마약 판매상'(사생 결단·2006) 등 '비주류 캐릭터'를 주로 해왔던 그의 이미지와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다. 열성팬에겐 이런 밋밋함이 '배신'이 될 수도 있지만, 그는 이 역할을 해낸 자신이 "기특하다"고 말했다.

◆과거- "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안타깝게 상당부분 편집"당했지만, "로이드는 한마디로 마음 둘 곳 없이 정서적인 방황을 겪었던 캐릭터"라고 했다. "엘리트면서도 세상에 정 붙이지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태도요. 숨겨진 외로움, 뭔가 모르는 우울함을 승화시키는 슬랩스틱 동작이 있었어요. 그게 되게 우아해 보이는 거에요. 부럽기도 하고." 로이드가 처음으로 열심히 해보는 게 조선 최초 라디오 생방송 드라마인 '사랑의 불꽃' PD 생활이다.

류승범이 로이드 같이, 일종의 '안 드러나는' 캐릭터에 빠져든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정신적인 충격? 받았죠. 2년 전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독하게 올라 최일도 목사님이 하는 곳을 찾았어요. '당신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하더라고요. 내 이름, 내 직업, 내 차…. 무엇도 해답을 주지 못했죠. '난 X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이제 시작이다"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였죠. 그땐 에고가 내공인 줄 알았어요. 나와 남을 가르고, 세상과 담쌓고 그러면 그게 내공이 쌓이는 건 줄 알았어요. 청춘의 패기와 함께."

가장 색깔 있는 배우로 꼽혔던 그가 '내 색깔은 무엇일까' 하고 고민했다는 얘기도 했다. "예전엔 '미디어라는 허상 속의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고심했었죠. 내가 웃긴가? 날라리인가? 비주류인가? 연기파인가? 그동안 난 하나인 줄 알았죠. 지금 보니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어요."

그는 "설렌다"고 했다. "지금까지 뭐 시작도 안 한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그렇고 인간으로서도 이제 시작이에요. 내 걸 더 끄집어내고 싶어요."

◆미래- "평생 '딴따라'를 할 것."

1999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했으니 올해 벌써 10년 차 배우. "진정한 배우로서의 그릇이 언제 드러날진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멋진 딴따라로 계속 남고 싶어요."

2년 동안 일을 쉬면서 류승범도 로이드만큼 인생을 관조하게 된 듯싶었다. "어렸을 때는 '일찍 죽고 싶다' '늙지 않고 싶다' 그런 생각들 하지 않나요? 지금은 30대의 내가 궁금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50세가 된 뒤 생활도 궁금하고…. 나이 드는 게 정말 좋아요. 배우 숀 펜 있죠. 그 사람의 필모그래피(출연작)를 보면 인생이 보이잖아요. 이제 그런 인생을 살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