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과 점, 점, 점… 그 속에 우러나는 '균형의 미'

어둑한 전시실에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18세기 프랑스 작곡가 장 필립 라모(Rameau)가 지은 상냥한 곡조의 '사라방드'(3박자 춤곡의 일종)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본관에서 작년 이중섭 미술상 수상 작가인 홍승혜(洪承蕙·49) 서울산업대 조형예술과 교수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가로 3.6m, 세로 2.7m짜리 흰 스크린에서 까만 막대 하나가 춤곡 박자에 맞춰 12시 방향에서 3시 방향으로 회전했다. 막대는 유연한 반원을 그리며 스크린 하단으로 뚝

떨어졌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와 까만 막대와 푸른 막대로 갈라졌다. 까만 막대와 푸른 막대가 2인무를 추듯 엇갈렸다 마주쳤다 포개졌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2분28초짜리 플래시 애니매이션에 홍씨는 '센티멘털'(The Sentimental)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밖에도 설치 작품, 평면 회화 등 모두 13점을 선보인 이번 개인전의 제목은 '파편'(Debris)이다. 홍씨는 "이제까지 성취한 것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짓는 전시"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작업은 차갑고 논리적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번 개인전을 보고 미술 평론가 강수미(39)씨는 "유머가 넘친다"며 새로운 면모에 감탄했다.

홍씨는 "내 작업이 예술이라고 불려도 좋고 예술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좋아요" 했다.

"예술이 뭐길래…. 작가들이 '예술'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리는 게 안타까워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도취와 도취된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거리(distance), 두 가지예요."

홍씨는 1997년부터 줄곧 '유기적 기하학'이라는 주제 아래 직선과 점으로 이뤄진 기하학적 형태를 반복하거나 분할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녀는 "미술이 재현하는 대상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쉬운 말로 하면 "도화지에 사과를 그릴까, 사람을 그릴까?" 궁리하는 대신 "이 공백을 어떻게 나눠야 가장 균형 잡힌 비율에 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는 뜻이다.

"극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라고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삶의 매 순간 우리가 결정해야 할 것은 결국 '균형'이지요. 사람과 사람의 균형, 소유와 버림의 비율. 우리가 균형을 꿈꾸는 건 우리가 흔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모순과 흔들림을 받아들이는 것, 인간 존재의 이율배반을 환상 없이 이해하는 것, 흔들림과 균형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포착하고 싶었어요."

홍씨는 포토샵으로 작업한 뒤 평면에 프린트한다. 홍씨의 컴퓨터에 USB 포트 하나만 꽂으면 얼마든지 그녀의 작품을 훔쳐서 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치 작품도 그녀가 손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 이런 저런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훔칠 수 없는 것은 작품에 담긴 '아이디어'다.

"맞아요. 그러니까 전시장에 놓인 구체적인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가 미술이지요. 그러나 관객이 내가 못 본 것을 보고 가도 아무 상관 없어요. 자기 앞에 던져진 것에 대한 사유는 각자의 몫이지요. 나는 '이렇게 봐달라'고 주문하지 않아요."

홍씨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센티멘털'을 보고 '선과 면이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을 사유하는 대신, 관객 각자가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조용히 반추해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26일까지.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