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쇼팽의 필터를 통과한 듯… 개성만점의 연주

바흐의 엄숙한 대위법도 그의 건반 앞에서는 노래가 됐다. 19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쇼팽, 차이코프스키, 퀸 엘리자베스 등 세계 주요 콩쿠르의 입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피아니스트 임동혁(23·사진)이 골라든 곡들은 오로지 바흐였다. 독일의 아우토반을 질주하면서도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은 음악이라고 말했던 이 청춘이 '음악의 아버지'와 대면한 것이었다.

첫 곡인 시칠리아노 G단조(빌헬름 켐프 편곡)부터 그의 해석은 마치 쇼팽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바흐 같았다. 건반 앞에서 잔뜩 상체를 수그리는 특유의 자세로 한껏 여리고 감성적인 톤으로 선율을 빚어나갔다.

1부 마지막 곡인 샤콘느에서도 마치 낭만주의 독주곡을 듣는 듯한 화려한 정취가 가득했다. 피아니시모에 이르면 서정성도 극에 이르렀고, 박자가 빨라지면 더불어 격정적인 호흡도 거칠어졌다. 바흐라는 거장에 억지로 몸을 수그리며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색채를 마음껏 드러낸 '임동혁표 바흐'였다.

1955년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뒤부터, 이 작품에는 '숫자 23'의 마법이 걸려있다. 당시 굴드의 나이가 23세였고, 독일의 미남 피아니스트 마틴 슈타트펠트도 23세에 데뷔 음반으로 이 곡을 녹음했다. 그만큼 건반 앞에 앉아있는 청춘들을 사로잡는 곡이다. 올해 만 스물 셋의 임동혁도 리사이틀의 2부에서 그 마법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변주곡에서 언제나 듣는 이의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다. 첫 곡인 아리아(Aria)의 박자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1955년의 초기 굴드는 속사포처럼 질주해갔지만, 1981년 만년의 굴드는 주름졌던 천을 펴는 듯이 한없이 느리고 서정적이다.

굵고 낮은 허밍으로 선율을 따라서 읊조리지만 않았을 뿐, 임동혁의 아리아는 만년의 굴드에 가까웠다. 하지만 곧이어 첫 번째 변주부터 다시 임동혁은 맑고 영롱한 톤으로 경쾌한 속도전으로 되돌아왔다. 7번과 9번 변주는 서정성을 담뿍 머금고 있었고, 10번대 변주들에서는 서로 강약을 대비시키는 아이디어가 빛났다. 노장들의 엄숙한 바흐에 친숙한 음악 팬들에게는 논쟁을 예고할 정도로, 개성 만점의 연주에 가까웠다. 때로는 꾸밈없는 솔직함이 위장이나 가식보다 나을 적이 있다. 이 날 그의 연주가 그랬다.


▶ 임동혁 바흐 리사이틀: 22일 고양아람누리, 26일 예술의전당, 28일 성남아트센터.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