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며 복 누리는 것… 모든 인간의 소망 아니겠소"

"남들은 날더러 '오지호 아들이라 좋겠다'고 합디다. 정작 나는 '아버지 같이 그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괴로웠어요. 죽은 동생은 더했겠지요. 나까지 피해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잠깐 침묵하더니, 서양화가 오승우(吳承雨·78·사진) 화백은 쾌활하게 덧붙였다. "이 나이 먹고 보니 사람 사는 데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나 싶어요. 모든 인간이 원하는 것은 결국 '수복강녕'(壽福康寧) 아니겠어요?"

오 화백이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7년 만에 개인전을 열고 '십장생도'를 주제로 유화 100여 점을 건다. 그는 한국 현대 서양화단의 거목인 오지호(吳之湖·1905~1982) 화백의 아들이자 오승윤(吳承潤·1939~2006) 화백의 친형이다. 그는 28세, 29세, 30세에 내리 세 번 국전 특선을 차지했다. 39세에 국전 초대 작가, 63세에 예술원 회원이 됐다. 한번 주제를 붙들면 10년씩 놓지 않는 집념의 작가다. 20~30대엔 전국의 사찰을, 40~50대엔 전국의 산을 그렸다. 60세를 넘긴 뒤 중국, 네팔 등지를 돌며 동양 고(古)건축물을 그렸고, 70세에 '십장생도'라는 화두를 잡았다.

그림만 집요하게 그린 게 아니라 일상생활도 수십 년을 여일하게 보냈다. 그는 서울 홍은동 비탈길에 있는 2층 단독 주택에 35년째 산다. 30평짜리 작업실엔 40년 넘게 쓴 화구통이 있고, 꽃병만한 필통 10여 개에는 오래 쓴 붓 수백 자루가 꽉꽉 꽂혀 있다.

그는 80호(145×112㎝)~100호(162×130㎝)짜리 유화를 한 달에 두 점씩 그린다. 힘이 나고 흥이 나면 소품도 한두 점 한다.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세 끼 밥 먹고 동네 수영장에서 운동하는 시간만 빼고 해 질 때까지 계속 그린다. 종일 그리다 저녁 먹고 폭탄주 두어 잔을 들이킨 뒤에 밤 9시면 취침한다.

 

오 화백은 청년 시절 7년간 여고 미술교사로 근무한 것을 빼면 평생 직장에 적을 두지 않았다. 골프도, 낚시도, 바둑도, 화투도 할 줄 모른다. 그림 말고 다른 길은 시도도,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인생이었다. 위기는 있었다. 그는 한낮에도 집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1986년이었지요. 갑자기 앞이 침침하고 직선이 곡선으로 굽어 보입디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말을 막 하데요. 점점 나빠질 거라고, 고칠 수 없다고요."

선천성 망막 기형이 악화돼 실명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이었다. 그는 시름에 젖어 지내다 누이가 사는 독일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눈에 붕대를 싸매고 독일 입원실에서 하룻밤 혼자 자는데, 밤이 참 길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자신을 굽어보며 "앞이 보이냐"고 묻던 독일 의사의 새파란 눈동자를 그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어려서부터 근시와 난시가 있었어요. '그림 그려야 하는데 이렇게 낳아줬다'고 부모님을 원망했지요. 앞이 안 보일 뻔하고 나니 달라집디다. 내가 낼 모레 여든인데 이 나이까지 그려왔으니 다행스럽고 감사하지요."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하는 세상에 대한 관조, 고마움, 베풀고 싶은 마음이 '오승우식(式) 십장생도'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가 그린 십장생은 색채가 화사하고 필치가 시원하다. 산, 달, 돌, 물, 솔, 학, 구름, 거북, 사슴, 불로초가 혹은 호방하게 혹은 소담하게 화폭을 메운다.

그는 "십장생도야말로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우리만의 그림인데 일제를 거치며 맥이 끊겼다"고 했다. 그것을 서양화로 다시 그리는 작업은 그가 일생 "한국적인 서양화가 무엇인가" 고민한 끝에 다다른 해답이기도 하다. 다음달 10일까지.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