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색(色)에 탐닉하다

꼼꼼하고 깐깐하기로 따져서 어떤 사람이 '매우 그렇다/약간 그렇다/보통이다/별로 아니다/전혀 아니다' 중 어느 칸에 해당하는지 각자 채점해본다고 치자. 김병종(55) 서울대 미대 교수를 아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매우 그렇다'에 동그라미를 칠 것 같다. 김 교수는 2006년 쿠바, 브라질, 멕시코 등 남미 7개국을 3주일간 여행했다. 가로 454.6㎝, 세로 181.8㎝짜리 캔버스를 놓고 넉 달간 붓질에 골몰한 끝에 하루 열 두 번 물빛이 변하는 카리브 해의 청색 물결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스스로는 "성에 차지 않지요. 나는 평생 한번도 내가 그린 그림이 성에 찼던 적이 없어요" 했다.

김 교수가 12일부터 26일까지 보름간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 신작 80여 점을 건다. 수려한 글과 화려한 그림으로 남미 여행을 기록한 이번 전시회에 그는 '길 위에서'(On the Road)라는 제목을 달았다.

인터뷰는 과천 선바위역 근처에 있는 지상 15평, 지하 15평짜리 작업실에서 이뤄졌다. 작업실 복판에는 50여 개의 붓이 물통에 꽂혀 있고, 발 닿는 곳마다 크고 작은 새 캔버스가 어른 가슴 높이로 쌓여 있었다.

그는 새 캔버스를 보면 압박감을 느끼는 대신 "캔버스가 좀 쌓여 있어야 '아, 작업 좀 해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남미 여행은 어린 시절의 색(色)을 찾아가는 여행이었어요. 저는 잠시만 걸어도 끝이 나는 시골 읍에서 자랐어요. 감수성이 예민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속내를 나눌 사람이 없었어요. 외로웠지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도 있고요. 자칫하면 선병질적인 문학청년이 됐을지 모르는데, 자연이 균형을 잡아줬어요."

그가 기억하는 전북 남원은 산에서 닭이 푸드덕거리고 들에서 진달래가 불타오르는 색채 선명한 땅이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온 뒤 "내 주변 어디에도 그런 색은 다시 없어서 어쩐지 스산한 기분으로 청춘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80년대에는 골판지에 검은 먹으로 그린 '바보 예수' 연작을, 90년대에는 물고기, 새, 사람, 폭포를 아이처럼 천진한 색채로 묘사한 '생명의 노래' 연작을 발표했다. 90년대 말부터 예술가들의 행적을 따라 국내외를 여행한 '화첩 기행' 시리즈를 선보였다. 색채에 관한 한 이번 전시는 가일층 화사하고 선명하다. 아크릴 물감, 캔버스 등 서양화 재료도 거침없이 썼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집은 벽도, 담도, 문도 '이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새파랬어요. 행인들이 입은 옷, 거리 풍경, 담벼락 색깔…. 남미 어딜 가나 야만적일 정도로 강렬한 원색을 아무 주저 없이 흐드러지게 쓰더군요."

미술평론가 이주헌(47)씨는 "이번 전시에 걸린 그림에서 우리는 그가 남미에서 느낀 강렬한 색채감을 생생히 맛볼 수 있다"며 "그림 속 주인공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게 그저 단순한 동작이나 행위로 다가오지 않고 삶의 열정을 못 이겨 그렇게 뿜어내고 분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썼다.

김씨는 입말로 문어체를 구사한다. 느리고 무거운 듯한 그 독특한 말투에 문학에 미치고 연극에 미쳤던 청년 시절이 녹아있는지 모른다. 그는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듯, 내 그림에 문자향(文字香)이 배어드는 것, 인문학에 탐닉한 내 습성이 배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 틀을 깨버리되, 틀을 깨야 한다는 강박에서마저 자유로워지고자 한다고 했다. 전시문의 (02)734-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