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남은 조카도 내 그림을 봤으면…"

캔버스가 첩첩이 쌓인 기다란 복도를 지나자 물감 튄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밝게 웃는다. 서울 홍익대에 있는 대학원생 공동 작업실이다. 탈북작가 선무(36·홍익대 미대 대학원 재학)씨가 10년 전 북에 두고 온 조카의 초상화를 매만지고 있었다. 까만 머리를 토끼처럼 양 갈래로 쫑긋 묶은 꼬마가 꽉 닫힌 보온병 뚜껑을 조심스레 여는 장면이다.

"떠날 때 두 살이었습니다. 이젠 제법 어른 꼴이 나겠지요."

그는 1998년 두만강을 건넜다. 부모와 형님 두 분, 어린 누이를 남기고 왔다. 3년간 중국을 헤매다 "국적을 가지고 떳떳하게 살고 싶어" 선양, 베이징, 쿤밍을 거쳐 라오스 국경을 넘었다.

그는 서울에 와서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나라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중국 동포인 부인(24)과 결혼해 생후 10개월짜리 딸도 낳았다. 세 식구가 나라에서 내준 방 두 칸짜리 임대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부인이 피부 관리실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해서 번 돈 100만원으로 한 달을 산다. 넉넉하진 않아도 틀은 잡혔다. 북에 두고 온 가족과 남에서 새로 이룬 가족―. 눈 앞에 자신의 가족이 있지만 그는 "북에 있는 가족이 꿈에 보여요" 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미대를 다녔다. "그림 잘 그린다고 남들은 10년 하는 군 복무를 3년 만에 마쳤지요. 그러나 어떤 그림을 그려도 '내 그림'이라는 애착이 없었어요. 당에서 그리라는 대로 그리면서 마치 내가 그리는 양 착각했지요. 여기 와서 내 맘대로 그리면서 평생 처음 '아, 이런 것이 미술이구나!' 싶었어요."

그는 북한 어린이들이 체제를 선전하는 무용을 하고 있는 장면을 담은 유화를 주로 그린다. 아이들은 활짝 웃고 있지만, 그림자는 마른 등을 수그리고 있다. "고향 역 앞에서 동냥하던 어린 거지들"이다. 그렇지만 그가 화실에서 매일 한 번이라도 붓질을 하는 그림은 조카의 초상화다. 그것은 꿈에도 못 잊을 가족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이다.

"사진도 없습니다. 저는 기억만으로 제 어린 조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가족에 대한 한(恨) 맺힌 제 마음입니다. 꽉 닫힌 병뚜껑이 열리듯 북한이 제발 조금씩 열려서 조카와 그들 세대만은 어른이 됐을 때 잘 먹고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선무 씨의 작품은 서울 관훈동 그라우갤러리(02-720-1117)에서 열리는 '이상한 나라의 소품'전(4월 14일까지)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