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숨이 끝날 때 내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입력 : 2008.03.31 23:39 | 수정 : 2008.04.01 08:25

    프랑스 화가 로만 오팔카 인터뷰
    43년 동안 써나간 숫자 555만 넘어
    붓질하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
    "내 작업은 시간 속 산책하는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변했습니다.”로만 오팔카가 젊은 날부터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얼굴을 차례로 촬영한 사진작품 옆에 섰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1965년 어느 날, 폴란드 출신 프랑스 화가 로만 오팔카(Opalka·77)가 가로 196㎝, 세로 135㎝짜리 캔버스에 팥알만한 크기로 1부터 숫자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캔버스 하나를 다 메우면 다음 캔버스로 숫자를 이어갔다. 처음엔 검은 바탕에 흰 물감으로 썼다. 이후 캔버스를 옮길 때마다 검은 바탕에 1%씩 흰색 물감을 더해 차츰 밝아지게 했다.

    그 뒤 43년이 흐른 2008년 3월 31일 현재, 오팔카는 227번째 캔버스에 7자리 숫자를 쓰고 있다. 숫자는 이미 555만을 넘었다. 그 중 3점이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 걸렸다. 학고재 개관 20주년 기념《센시티브 시스템즈 전》의 일부다. 검은 바탕은 이미 흰 빛이 됐다. 눈 위에 눈이 쌓이듯 흰 바탕에 흰 글씨가 빼곡히 적힌 캔버스 앞에 서서 오팔카는 "나는 '시간'을 표현하는 데 인생을 바쳤다"고 말했다.

    "시간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이 죽음을 만들어내니까요. 죽음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밋밋하고 의미 없을 겁니다."
    오팔카는 "내가 평생 그린 모든 캔버스가 실은 단 하나의 작품"이라며 "내가 죽어서 더는 숫자를 쓸 수 없게 될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첫 붓질을 할 때 이미 작품을 완성한 건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끝'을 내다봤으니까요."

    그는 1972년부터 매일 똑같은 머리 모양, 똑같은 셔츠, 똑같은 무표정으로 자기 얼굴을 촬영했다. 셔츠 모양이 달라질까 봐 평생 입을 셔츠 20장을 미리 사뒀다. 머리 모양이 달라질까 봐 평생 이발소에 가지 않고 손수 머리를 잘랐다. 오팔카는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흐른다"며 "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간을 남김없이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그 중 7장이 학고재에 걸렸다.

    색채도, 구도도 없는 오팔카의 작품에는 관객을 휘어잡는 힘과 서정이 있다. 미술 평론가 임근준(37)씨는 "사람들이 '미술 작품엔 화가의 개성이 강렬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을 때, 오팔카는 색채·구도·형태 등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요소를 전부 삭제하고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자신의 '행위' 그 자체를 미술로 승화시켰다"고 말했다.

    오팔카는 파리 근교에서 부인과 단 둘이 고양이를 키우며 산다. 매일 오전 8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면 캔버스 앞에 앉는다. 그는 "시간 속을 산책하듯 숫자를 쓴다"고 했다. 30~40대엔 1년에 20개씩 정력적으로 캔버스를 메웠다. 요즘도 매년 2~3개의 캔버스를 꾸준히 메운다.

    오팔카는 "나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문학으로 한 작업을 캔버스 위에 했다"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급식 시간마다 검은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었어요. 흰 우유에 검은 빵이 서서히 풀려가는 걸 바라보면서 '시간'에 대한 내 상념이 시작됐지요. 프루스트가 마들렌 빵을 홍차에 적셔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간에 대해 명상했듯이 말이에요."

    전시는 다음달 25일까지.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