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의 꿈은 끝이 없어라

서양화가 정일(50)씨가 18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서울 신사동 예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유화 40여 점을 건다. 그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1983년부터 지금까지 금호미술관, 관훈미술관, 선화랑 등 국내 주요 미술관과 화랑에서 거의 매년 개인전을 연 중견 작가다. 그런 그의 이력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대뜸 그의 그림과 마주친 초보 관객이라면 혹 작가가 어린 소년은 아닐까 궁금해할지 모른다. 이번 예화랑 전시에 걸린 그의 작품은 그만큼 꿈결 같고 동화 같고 서정적이다.

가령 〈축제의 날〉은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바탕에 동화 속 공주와 왕자가 그려진 흰 그랜드 피아노가 서 있는 그림이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초콜릿 빛깔 바이올린에서 달콤한 선율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한편 〈강가에서〉는 봄빛 완연한 어느 날 흰 꽃 소담하게 부풀어 오른 꽃나무 아래 흰 새를 가슴에 품은 신랑과 신부가 고요히 눈을 감고 서 있는 유화다.

바이올린을 옆에 둔 채 풀밭에서 소르르 잠이 든 공주에게 왕자가 가만히 입맞춤하는 〈공주는 잠이 들고…〉는 동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고, 화폭 가득 푸른 봄날을 담은 〈봄비〉에서는 꽃 같은 흰 새들이 작은 날개를 털며 지지배배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씨는 한국 현대미술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조각에서 설치로 무게 중심을 옮겨오는 동안 주류 혹은 유행에서 한발 비켜나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작가다. 그는 촛불과 파이프 담배, 장난감 목마와 흰 새, 바이올린과 그랜드 피아노, 달과 꽃과 비와 바람으로 화폭을 채운다.

미술평론가 박영택(45) 경기대 교수는 "사랑이 불가능하고 동심과 꿈, 환상이 지워져 가는 시대에 정씨가 역주행하고 있다"며 "사랑이나 낭만, 동화와 아름다움 같은 단어들이 너무 식상해져서 관념적이 되어 버렸지만, 정씨는 그 단어들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라고 썼다. (02)542-5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