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방앗간에 건 수몰 학교의 추억

    입력 : 2008.04.27 23:15 | 수정 : 2008.04.28 06:28

    ●전북 계남마을의 '진안골 졸업사진첩展'
    흑백사진 500여점 곳곳에 코끝찡한 사연 붙어
    기획한 김지연씨 "행상 취급 받으며 모았어요"

    전북 진안군 계남 마을 토박이 주민들이 옥수수를 심다 말고 계남정미소에 들렀다. 용담댐 건설로 폐교되거나 이전한 6개 초등학교 의 졸업사진을 둘러보며“이런 사진을 워디서 다 구해 왔디야?”하고 감탄했다. 왼쪽부터 사진작가 김지연씨, 주민 박선자·이연자·황용수·전경수·이현순·김금순씨.
    파란 파가 돋아난 검은 밭고랑을 지나 들길이 구불구불 휘어진 곳에 지은 지 30년 넘은 빨간 양철지붕 정미소가 서 있었다. 25일 오후 전북 진안군 마령면 계남마을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시간에게 길을 묻다―진안골 졸업사진첩전》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봄바람에 나풀거렸다.

    버려진 정미소를 개조한 15평짜리 전시장에는 흑백사진들이 촘촘하게 걸려 있다. 용담·용평·정천·모정·상전·조림 초등학교 등 용담댐 건설로 물에 잠겼거나 부지를 옮긴 인근 초등학교 여섯 곳의 졸업사진과 자료사진 500여 점이다.

    흑백사진 사이사이에 교지에서 발췌한 코끝 찡한 사연도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쓴 동시, 버스 정류소·방앗간·이발소·쌀가게 등 이제 곧 수몰될 자기네 마을의 명소를 어린 눈으로 소상하게 기록한 글, 선생님이 제자에게 주는 글 등이다.
    1908년 개교해 1999년 수몰된 용담초등학교의 1926년, 1938년, 1956년 졸업사진(왼쪽부터)./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 제공
    "우리는 47회 졸업생/우리 학교 마지막 졸업생이다/1792명 형님들의 뒤를 따라/용평 초등학교 동문이 된다" (용평초 6학년 권오철군의 동시 〈우리 학교〉·1997년 용평초 교지)

    "정천 정류소는 1932년 4월 5일 할아버지가 문을 열었으나 1980년 돌아가셔서 지금은 우리 아빠 임선택씨가 하십니다. 정류소는 차표도 팔고 마을 사람들이 쓰는 농사 재료도 팝니다. 과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조림초 1학년 임채옥양·1995년 조림초 교지)
    "(졸업생 여러분이) 공중전화 앞에 다섯 번째로 서 있다가도, 뒤에서 모르는 아주머니와 할아버지가 초조해하면 슬그머니 물러나 여덟 번째로 통화를 하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그런 마음씨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남이 물으면 '지금은 학교도 마을도 물에 잠긴 정천 초등학교에서 배웠습니다'라고, 조금 쓸쓸하지만 자랑스럽게 대답했으면 합니다." (송기순 당시 정천초 교감·1997년 정천초 교지)

    이 전시를 기획한 사진작가 김지연(60)씨는 작년 여름부터 올 초까지 전북도청, 진안군청, 마이산 종합학습장과 인근 초·중학교들을 여러 차례 오가며 사진을 모았다. "처음엔 숱하게 행상 취급받았지요. 그러나 끈질기게 찾아가서 간곡하게 졸랐어요. 용담댐 건설로 68개 마을이 물에 잠겼어요.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통해 거기 살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다고 (공무원들을) 설득했지요."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씨는 용담댐에도, 계남마을에도 아무 연고가 없다. 계남정미소에 걸린 사진은 그녀에게 '남들의 추억'이다.

    김씨는 전남 광산군(현재 광주광역시로 통합)에서 나고 자랐다. 할아버지는 미곡상이었다. 그는 광산김씨 집성촌에서 타성바지 김해김씨로 사는 외로움을 열심히 돈 버는 것으로 풀었다. 그렇게 모은 재산을 외아들인 김씨의 아버지가 흩트렸다. 문학청년이던 김씨의 아버지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장학사업을 하느라 가산을 죄다 쓰고 파산했다. 맏딸인 김씨가 열 살 때였다.

    "그 뒤 어머니가 삯바느질해서 6남매를 키웠어요. 끼니가 떨어지곤 했지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미술학원에 갈 엄두를 못 냈어요. '연극과는 실기학원 안 다녀도 들어갈 수 있겠지' 싶어 서울예대에 갔어요. 열심히 연극을 했지만 마지막 학기 등록금이 없어 졸업을 못 했지요."

    김씨는 서울에서 고단하게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전주로 시집을 갔다. "절실하게 이루고자 했던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살았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때마다 김씨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정미소를 돌아다니던 추억을 떠올리고 위안을 받았다. 정미기에서 쌀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은 그녀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감정적인 풍요가 농축된 풍경"이었다.

    김씨는 3남매를 다 키워놓은 1999년부터 사진을 배웠다. 그녀는 지금까지 전국 정미소 500여 곳을 촬영했다. 2000년에 마련한 마티즈로 8년간 17만9000㎞를 뛰었다. 2005년 김씨는 갓 폐업한 계남정미소를 500만원에 사들였다. 1억 원을 들여 내부를 수리한 다음,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논밭 한가운데에 있는 외진 전시장이지만, 개관 이후 지금까지 전국 곳곳에서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객이 대학노트 4권 분량의 방명록을 채웠다. 용담댐 수몰 지역 초등학교 사진을 들여다보며 김씨는 "나는 무슨 거창한 대의도 내세우지 않고, 대단한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용담댐 수몰민을 제외한 다른 관객들에게 여기 걸린 사진은 '남의 이야기' 혹은 '타인의 추억'에 불과할테지요.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추억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기억'을 읽어요.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요?"

    9월 30일까지. 월요일은 쉰다. 일반전화가 없다. 문의 saltbo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