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에 불(佛) 유학… 내 그림, 그때부터 밝아졌죠"

재불(在佛) 원로 화가 정기호(70·사진)씨가 서울 경운동 다보성 갤러리에 유화와 드로잉 46점을 걸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반짝반짝 찰랑거리는 센강, 콧김을 씩씩 부는 하얀 소, 달덩이처럼 둥근 얼굴의 화가, 해변에 드러누운 나부(裸婦) 등을 아이처럼 천진한 필치로 그렸다. 흡사 관객에게 "햇살은 따뜻하고 일상은 느긋하다"고 노래하는 듯한 그림이지만 정씨 자신의 인생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전북 남원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막노동을 했어요. 월사금이 밀려 초등학교를 중퇴했지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집에 가라'고 쫓아냈어요. 남들은 공부하는데 나 혼자 집에 오던 기억이 생생해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하지만 미대 진학은 꿈도 못 꿨지요. 젊어선 한스러웠어요. 이 나이 되고 보니 그저 웃습니다. 운명이었으려니, 하고."

정씨는 풀빵도 팔고 냉차도 팔고 공사장에서 모래도 나르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 달에 20일 일해서 양식 값과 물감 값을 벌고, 나머지 열흘은 단칸방에 틀어박혀서 오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도서관에 가서 미술 서적을 읽었다. 영양 실조로 시력을 잃을 뻔한 적도 있고,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한 적도 있다. 그는 아들 여섯 형제 중 넷째다. "형님들이 말리지 않더냐"고 묻자 "내가 고집이 센 데다, 권투를 좀 하기 때문에…. 아마 감히 말을 못 꺼냈을 거예요"라고 했다.

"심신이 너무 아파서 '이게 바로 생지옥이구나.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그래도 그림을 관둘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아무리 괴로워도 붓만 잡으면 온갖 잡념이 사라졌어요."

학벌도, 인맥도 없었지만 지인들이 정씨의 그림을 사기도 하고 전시도 열어줬다. 그들의 도움으로 정씨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57세에 아내 조경석(63)씨와 함께 프랑스에 건너갔다. 어둡고 음울하던 그림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부터다. 그는 온종일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거의 매년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전시회를 열고 있다. 스무 번째 개인전이 되는 이번 전시는 15일까지 열린다. (02)730-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