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현대미술의 좌절… 그 너그러운 성찰

독일 현대미술가 시그마 폴케(Polke·67)의 공(功)은 1960년대 미국의 팝아트를 독일화하는 과정에서 '회화가 의미를 구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척한 데 있다. 동독에서 태어난 그는 열두 살 때 서독으로 이주했다. 폴케는 뒤셀도르프미술학교 재학 중이던 1963년에 역시 동독 출신인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Richter·76) 등과 함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화답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자본주의 세계의 팝아트를 접목해서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다.

폴케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인쇄물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망점'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발견했다. 회화와 사진을 비롯한 모든 이미지는 인쇄 과정을 거치면서 망점으로 환원된다. 폴케는 망점이 역사적 층위를 통합하는 채널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서 새로운 의미의 광맥을 발견했다. 전통적인 그리기 방식(번져나가는 이미지)과 팝아트식 망점을 한데 겹친 폴케의 회화에서 '레이어 회화'의 계보가 시작됐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그마 폴케: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Sigmar Polke: Music from an Unknown Source) 전》은 폴케가 1996년에 제작한 과슈(불투명 수채화) 연작 40점을 보여준다. 전성기의 작업이 아니니까 볼만한 게 없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 쉽지만, 어떤 면에선 정통 유화 작업보다 흥미롭다. 이 조촐한 전시는 '현대회화에서 시각언어로 말하는 방법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보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폴케는 자신의 망점 회화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더 크게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 동료인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탐구하며 차차 팝아트 영역권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폴케는 자신의 사진 작업과 회화를 하나로 묶는 데 실패했다.

폴케의 좌절감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리히터에 대한 선망도 종종 발견되고, 1990년대의 트렌드에 맞추려고 시도한 흔적도 엿보인다. 왕년의 명가수가 최신 히트곡을 읊조리는 것처럼 어색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50대 중반의 화가가 마음을 비운 채 자신의 그리기 방법을 다시 한번 고찰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작가는 논문을 쓰듯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 조건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다. 일정한 크기의 종이에 수채물감으로 쓱쓱 그리다 보니 작가는 한결 자신에게 너그럽고, 따라서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가는 데 실패한 지점들을 비교적 덤덤하게 재방문한다. 이 전시를 '폴케의 40장짜리 자기 연구 보고서'라 칭해도 좋겠다.

부제가 말하는 "미지의 세계"란 폴케가 자신의 그림에 인용한 대중문화의 세계를 말한다. 한편 "음악"은 자신의 그리기 방법을 대위법에, 화면 위에 나타난 최종 결과를 악곡에 비유하는 것이다. 전시는 8월9일까지. (02)880-9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