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노장들의 반격

바둑은 언젠가부터 '나이의 게임'으로 변했다. 혈기 넘치던 시절 저승사자처럼 매섭던 손길도 서른 살을 넘기면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육체스포츠와의 구별이 애매한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랭킹 최상위권은 25세 이하 청·소년 기사들이 석권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간 관심권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던 40~50대 중견·노장기사들의 반격이 최근 눈에 띄게 늘어 주목 된다.

만 57세의 차민수 四단은 올해 초 제7회 춘란배서 일본의 강자 이마무라(今村俊也) 九단을 꺾더니 제2회 지지옥션배에선 쟁쟁한 여성대표 5명을 연파, 두 차례나 세계 8강에 올랐던 왕년의 괴력을 재현해냈다. 또한 김일환(52) 九단은 제5기 전자랜드배서 당당 8강에 올라있다. 그는 지난 해 같은 대회서도 청년 강호들을 제치고 4강 고지를 밟아 바둑계를 경악시킨 바 있다. 김 九단의 6월 랭킹은 53위지만 7월엔 40위권 진입이 확실시된다.

박진열(66) 八단의 경우는 더욱 놀랍다. 231명에 달하는 국내 현역프로들 중 여덟 번째 고령기사인 그는 지난 4월 109위에서 5월 55위로 무려 54계단이나 뛰어올랐다. 유례가 드문 엄청난 비상(飛上)이다. 전자랜드배 16강 진출로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지난 4월 하순까지 그의 올해 전적은 8승 5패로, 당시 승률(61.5%)이 최정예 젊은이들과 맞먹었다.

김종수(48) 六단은 지지옥션배 4연승으로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다. 조용한 성격으로 이름이 덜 알려져 실력보다 과소평가됐던 그가 모처럼 '본때'를 보인 것이다. 아마추어 시절 전국을 뒤흔들었고, 프로가 된 뒤에도 국제무대(제8회 삼성화재배)까지 밟은 바 있는 김 六단의 올 시즌 전적은 12승 8패(승률 60%).

조훈현(56) 九단과 유창혁(42) 九단도 새파란 후배들 틈에서 왕년의 스타다운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조훈현은 최근 LG배 세계기왕전 준우승자인 한상훈 三단에게 쾌승하는 등 올 바둑리그서 3승 2패를 기록 중이다. 최정상급 젊은이들과의 대등한 승부 속에 현 랭킹은 13위. 유창혁은 물가정보배 천원전 GS칼텍스배 등 3개 기전 본선서 맹활약을 펼치며 18위에 올라있다. 이 밖에 51세의 강훈 九단은 제13회 LG배본선 상륙 직전까지 진격했고, 김동엽(51) 김수장(51) 九단도 내로라하는 청년 맹장들의 꿈을 무참히 짓밟으며(?) 당당히 바둑리그에 입성했다.

지난 2006년 한국기원은 2000년대 진입 이후 7년간의 자료를 토대로 연령대별 승률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집계결과 10대가 63.0%로 최고였고 20대(58.9%), 30대(50.7%)의 순이었다. 그 뒤로 40대(38.3%) 50대(27.6%)를 거쳐 60대엔 18.3%로 급전직하, 나이와 승률 간의 완벽한 역배열 현상이 입증됐었다.

최근 40~50대 시니어들의 대반격 현상은 ▲젊은 기사들에게 자극이 되고 ▲노장층에겐 새로운 동기를 유발하며 ▲팬들에게도 식상함을 벗어나 관전 재미가 극대화되는 등 여러 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바둑계의 한 관계자는 "충실한 자기관리로 나이의 벽을 허무는 기사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로"라며 바둑계에 일기 시작한 새 바람에 큰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