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향기로 속삭이는 영혼의 형상들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자라 면이 되듯이 우리나라 미술도 그렇게 점점이 자라왔다. 추상회화를 이만치 키워온 것은 미술과 고락을 함께 한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척박한 토양에서 이뤄낸 결실을 광주리에 가득 담았는데 그것이 바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추상회화 1958-2008 전》이다. 이 전시에는 국내의 추상화가 44명의 작품 80여 점이 출품됐다.

전람회는 한국전쟁 후부터 지금까지의 추상회화를 조명하고 있거니와 초대작가들은 대부분 해방 후 설립된 한국 미술대학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은 허허벌판 같았던 화단을 오늘과 같이 '울창한 그림 숲'을 일 구는데 일조한 주역들이다.

새카맣던 그들의 머리에 어느덧 서리가 내리고, 몇 분은 이미 세상을 등진 터라 속절없는 세월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동안 이들은 무엇과 씨름해왔을까.

《한국추상회화 1958-2008 전》은 '공간과 물성', '행위와 유희','반복과 구조', '색면과 빛' 등 모두 네 개의 테마로 나누어져 있다. 각 테마의 특징과 작가를 알아보면 '공간과 물성'은 질료를 강조하거나 화면에서 펼쳐지는 '질료의 드라마'에 중점을 둔다. 정창섭, 박서보, 윤명로, 하종현, 차우희 등이 여기에 속한다. '행위와 유희'는 필치와 자유스런 몸짓 투영을 강조한다. 이강소, 곽훈, 오수환, 이두식 등이다. '반복과 구조'는 동일형태의 증식 및 단색패턴이 주된 요소로 등장한다. 정상화, 이봉열, 최명영, 이태현 등이다. '색면과 빛'은 화면을 순수한 색으로 덮거나 빛으로 초월적 세계를 계시한다. 김기린, 김봉태, 김형대, 서승원 등이다.

이밖에 고인이 된 윤형근, 이승조, 하인두, 최욱경, 하동철 화백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종래의 시대적 구분, 양식적 구분에서 떠나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미술관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그림에서 배어 나오는 농익은 기품과 내밀한 시각적 여운, 잔잔한 조형의 흥취에 젖어들었다. 아직도 향기로 속삭이며 다가오는 미술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숨가쁜 일과를 뒤로 하고 미술관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것은 특별한 감흥이 아닐 수 없다. 전시는 8월 23일까지. (02)2124-8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