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들, 천적에 운다

어떤 승부세계건 정상권 톱스타들에게도 천적은 있게 마련. 랭킹이나 타이틀전 성적만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될 것 같은데 특정 상대만 만났다 하면 오금을 펴지 못한다. 특히 프로 바둑계엔 그런 이색 커플들이 예상 밖으로 많다. 이름하여 바둑계 '킬러 열전'.

1년 가까이 부동의 1위로 군림 중인 최고기사 이세돌은 누구를 가장 무서워할까. 놀랍게도 '아줌마 기사' 권효진(26)이다. 대이세돌 통산 3승 1패로 승률 75%. 승단대회 기권승 한 판이 포함돼 있긴 해도 믿기 힘든 기록이다. 권 五단은 랭킹(이하 2008년 7월 기준) 92위에 올라있다. 천하의 이창호는 최근 물가정보배 8강전서 홍성지를 만나 또 패했다. 2007년 이후 4연속 패배, 통산 1승 4패다. 홍 六단(랭킹 14위)이 요즘 떠오르는 강호라곤 하지만 이창호를 이렇게 두들긴 기사는 일찍이 없었다.

이번엔 랭킹 3위 박영훈을 심판대에 세워보자. 64위 김성룡과는 몇 판을 두어 몇 승을 거뒀을까. 또 염정훈(113위)을 상대한 전적은 어땠을까. 정답은 둘 모두 박영훈의 2승 4패 열세다. 염 六단은 지난 해 마스터즈 챔피언십 대회 3연전서 2대1로 이기는 등 최근까지도 박영훈만 만나면 '임자'라도 되는 듯 펄펄 날고 있다.

랭킹 42위 김승준 九단은 '목진석(4위) 킬러'로 전혀 손색이 없다. 통산 11승 3패이니 압도적 승률이다. 2000년 이전엔 7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7세 연상인 김승준(35)이 이제는 밀릴 법도 하건만 작년 명인전 등 최근 2판서도 연승 중이다. 그런가 하면 랭킹 5위의 강타자 조한승은 안달훈 七단을 가장 거북해한다. 통산 2승 6패로 승률이 25%밖에 안 된다. 안 七단의 현 랭킹은 95위.

백대현 六단은 "원성진이라면 내게 맡겨!" 하고 큰소리칠 만하다. 71위의 신분으로 8위 랭커 원성진에겐 4승 1패로 앞서 있다. 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백홍석(9위)은 윤혁(45위)에게 이른바 '판맛'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4합을 겨뤄 전패한 것. 박정상(6위)도 고근태(27위)에게 유독 약해 3전 전패를 기록 중이다.

'왕년의 스타' 서봉수가 '신세대 맹장' 중 한 명인 최철한에게 유독 천적으로 군림해 왔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98년 최철한과의 첫 만남 이후 내리 4연승을 달리던 서봉수는 2002년 2연패를 당했으나 2007년 맥심배 8강전서 또다시 노장의 매운 '손맛'을 보여주었다. 통산 5승 2패로 승률 70%가 넘는다. 올해 23세인 최철한의 랭킹은 11위, 55세 서봉수는 77위. 이쯤 되면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다.

바둑계의 '천적 현상'은 어디서 올까. 기풍(棋風) 차이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최고 반열의 스타들도 특정 스타일을 만나면 거북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계산바둑의 달인'으로 꼽히는 박영훈이 철저한 실리파인 김성룡에게 고전하는 것이 한 예. 성장 과정에서의 인간관계도 작용한다. 이세돌은 권효진의 아버지(권갑룡 七단)가 운영하는 도장에서 함께 컸다. 어린 시절 함께 수학하던 한 살 위 '동문 누나'에 대한 공포감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승부의 묘미가 예상을 뒤엎는 반전(反轉)에 있다면, 킬러나 자객(刺客)이야말로 바둑계의 반가운 손님들이다. 앞으로 또 어떤 언더독(underdog·열세예상선수)이 등장해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메다꽂고 화제를 이어나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