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 '거목의 숲'을 거닐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1974년 6월16일, 뉴욕에 비가 내렸다. 죽음을 한달 여 앞둔 김환기(1913~1974)는 그렇게 그날의 일기를 맺었다. 그는 만년에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한 사람에 하나씩 캔버스에 빼곡히 점을 찍었고, "모든 것은 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들이 남긴 대표작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가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열리고 있다. 김환기·유영국(1916~2002)·김창열(79)·백남준(1932~2006)의 대표작 55점, 1970년대부터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정상화(76)·이우환(72)·문승근(1947~1982)의 대표작 28점 등 모두 83점이다.

거장들의 시기별 대표작을 모아서,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은 동시대 작가들끼리 짝지어 작품을 마주 세웠다는 점이 돋보인다.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대가들이 우애롭게 어깨를 나란히 한 격이다. 김환기·유영국의 추상화를 나란히 걸고,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 앞에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작품을 세운 다음, 정상화·이우환·문승근의 작품이 연달아 이어지게 하는 식이다.

널찍한 공간에 우뚝 선 백남준의 설치작품 〈나의 파우스트―운반〉은 높이 3.54m의 대작이다. 성당 첨탑처럼 생긴 나무틀 안에 TV 모니터 26개가 쌓여있고, 거기서 색채 선명한 영상이 경쾌하게 명멸한다. 그 뒤에 걸린 캔버스에서는 김창열의 붓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1983년 작품부터 올해 그린 신작까지 맑고 차분하게 반짝거린다.

이어지는 방에서는 화면 전체에 보이지 않는 힘이 꽉 찬 정상화의 그림, 텅 빈 공백에 푸른 선을 긋고 검은 점을 찍은 이우환의 그림, 서른다섯에 요절한 문승근의 치밀한 그림이 삼중주처럼 어우러진다.

대가들이 밀고 당기듯 주고받은 예술적 영감과 인간적 정을 그림을 통해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김환기가 점을 찍으며 떠올린 옛 얼굴 중에 유영국이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해방 직후인 1947년 '신사실파' 모임을 만들어 한국 추상미술의 기반을 일궜다.

뉴욕에서 김환기는 옛 인연을 되새기고, 새 인연을 맺어줬다. 30대 청년작가이던 김창열과 백남준이 김환기의 집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둘은 훗날 서로의 예술을 각각 뉴욕과 서울에 소개하는 다리가 됐다.

이 전시는 국내 대표적인 상업화랑으로 꼽히는 갤러리현대가 강남점을 내면서 여는 개관 기념전이다. 전시장은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네 개 층이고, 면적은 1500㎡(450평)이다. 국내 화랑 가운데 최대 규모다. 서울 강남에 층당 100평이 넘는 복층 전시장을 낸 것은 지난 4월 피케이엠(PKM)갤러리에 이어 갤러리현대가 두 번째다. 서울 인사동에서 출발한 한국 화랑가가 사간동, 소격동, 삼청동으로 뻗어나가며 '화랑 벨트'를 형성한 데 이어, 서울 강남에서 대형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 소장가 보유 작품이 절반 이상이라 전시가 끝나면 한동안 일반인이 다시 보기 어렵다. 한국 현대미술사에 관심이 깊은 미술 애호가라면 꼭 한번 들러 볼 만하다. 전시장을 돌고 나오면 한국 현대미술이 어려운 시절을 헤치고 이만한 성취를 이뤘다는 데 관람객은 충만하고 흐뭇해질 것 같다. 전시는 28일까지. (02)519-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