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프로기사 25년 이쯤에서 접으려 합니다"

그간 100통은 족히 넘게 들었을 '부재중 신호음'. 그러던 지난 주말 전화선 저편에서 문용직(50) 五단의 목소리가 천국의 복음처럼 들려왔다. 돌연 프로기사 사직서를 내던지고 '잠적'한지 꼭 3개월 만이다. 바둑 패러다임 연구의 세계적 석학으로, 지구상 유일의 박사(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프로기사로 사랑 받아온 이 기인(奇人)은 "해외에서 몇 달 쉬다가 며칠 전 돌아왔다"고 했다. 대면(對面)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경기도 어딘가(지역번호 031)로 달려가지 못한 채 '유선(有線) 선문답'이 이뤄졌다.

―석 달 동안 어디서 뭘 하며 보냈나.

"즐겁게 지내다 왔다고만 알아주셨으면 한다. 어디서나 잘 지내는 편이다."

―기사직을 떠나겠다니 충격적이다. 예술가가 그렇듯 프로기사도 평생직업이다. 화가나 문인이 도중에 은퇴하던가?"

"83년 프로가 돼 25년째다. 충분히 했다.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인데 이제 그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왜 하필 지금인가.

"그 말은 언제나 적용된다. 언제 은퇴하건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까."

―바둑을 떠나서도 지낼 수 있겠나.

"바둑을 떠나는 게 아니고 프로기사 직을 내놓는 것뿐이다. 기자가 은퇴해도 글을 쓰듯, 기사직을 벗어나더라도 바둑은 계속 둘 것이다. 인터넷 대국실도 널려있고…."

―지난 해 11월부터 공식대국 기록이 없더라.

"사실은 몇 년 전부터 그랬다. 그간 패국(敗局)의 7할 정도는 부전패였다. 성적에 관심이 없어졌다. 하지만 일단 대국장에 나가면 열심히 두었다. 그게 동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직 이유가 궁금하다. 혹시 바둑계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었나.

"그런 거 전혀 없다. 불만으로 사표를 던지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애초부터 '바둑의 모범' 따위는 없다. 바둑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기사생활 하면서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이쯤에서 그만 접기로 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그런데 왜?'가 왜 꼭 필요한가."

―'바둑의 발견', '수법의 발견' 등은 바둑 패러다임 서적들 중 유사이래 최고의 저술로 평가 받아왔다. 이 분야에서 문 사범이 계속 맡아주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 돌아보니 원고에 매달리던 시절은 참 즐거웠다.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뭘 또 써보겠다는 생각은 현재론 없다. 그보다도 내가 왜 '발견'이란 말을 그렇게 좋아하고 남용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다."

―프로기사에서 정치학자로, 다시 프로기사로 몇 차례 변신을 거쳤다. 몇 년 전엔 주역(周易)에 심취해 그 쪽 전문서를 내기도 했다. 어떤 공부가 가장 재미있던가.

"흥미로만 따지면 셋이 비슷하다. 주역은 유쾌했고, 정치학 쪽은 사람이 넌덜머리가 나서 떠났다. 바둑은 기사직만 내놓았을 뿐이다. 셋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게 바둑이고, 그래서 바둑에 가장 큰 신세를 졌다. 이건 생업(生業)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프로기사를 내놓고 저술도 강의도 안 한다면 앞으로 무얼 할 생각인가. 혹시 언젠가 기사직 사퇴를 후회할 일은 생기지 않을까.

"나도 무얼 해 먹고 살까 고민 중이다. 앞날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다. 실업자가 됐으니 술 가끔 사 주시오(웃음). 기사직 사퇴를 후회하는 일이 절대 없으리라고 장담은 못하겠다. 그 경우 입단대회에 다시 나갈 수도…. 물론 농담이다."

―사표 제출 후 석 달이나 지났다. 한국기원이 수리를 쉽게 안 할 모양이더라."

"왜 안 하지? 몇 푼 안 되지만 퇴직위로금을 받아야 한 잔 먹는데…."

―한동안 우울증 증세로 고생했던 걸로 안다. 괜찮은가. 요즘도 비 맞는 걸 즐기나.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본 사람만이 그 기묘한 상쾌감을 인정할 것이다. 비 오면 맞는 게 정상이다. 우산으로 몸을 가리는 건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우울증 약은 10년 가까이 먹다가 호전돼 작년부터 끊었다."

―전성기 때 정상을 한차례(88년 신왕전) 밟았고 도전무대에도 두 번이나 섰었다. 바둑계 정복을 경험해 본 기사는 손꼽을 정도로 적다. 막상 은퇴한다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떠날 때 으레 감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도식적이다. 신왕전 우승은 즐거웠던 바둑인생의 한 순간이었을 뿐이고…. 개인의 진퇴는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세상을 이해시킬 수도, 그럴 필요도 없듯 세상이 나를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