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촉촉한 시선] 쇼박스와 충무로의 고민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괴물' '디 워'를 배급했던 쇼박스는 올해 몇 가지 우울한 기록을 세웠다. 상반기 당기순이익이 －56억. 2002년 ㈜쇼박스 설립 이후 사상 첫 적자다. 일주일 뒤면 영화계 최대의 대목 중 하나로 꼽히는 추석이지만, 올해 쇼박스는 추석 배급작이 없다. 역시 회사 설립 이후 처음이다. 아무리 2008년 추석 연휴가 며칠에 불과하다지만, CJ엔터테인먼트와 함께 국내 영화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대기업 영화사가 추석에 영화를 걸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상징적인 일. 덕분에 쇼박스가 영화 사업을 접는다는 오래된 루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2일 쇼박스의 유정훈(44) 대표이사를 따로 만났다. 지난 4월 대표이사 취임 후 언론과 만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는데, 유 대표의 자청(自請)이었다. 워낙 말 많기로 이름난 충무로지만, 하도 해괴한 소문이 많아 고민이라고 했다. 모기업인 오리온이 지난해 극장(메가박스)을 팔아버린 것처럼 쇼박스도 매각할 것이다, 관계사인 케이블 채널 온미디어의 영화사업부도 축소된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임박했다 등등. 장시간 나눈 유 대표와의 대화는 "우선 매각은 분명히 없다! 하지만 리셋(Reset)은 있다!"로 요약된다. 상장회사의 공시(公示)사안이라는 이유로 구체적 계획보다는 추상적 답변이 많아 아쉬웠지만, 충무로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동의할 대목이 있었다.

'리셋'이란 유 대표의 표현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허영에 대한 반성이자, 영화사업 축소 가능성에 대한 우회적 인정이기도 했다. 마땅한 작품이 없는데도 추석이나 설날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량 미달의 작품을 과잉 포장해 내걸지는 않겠다, 이 원칙은 1년 내내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른 산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요동 심한 흥행 산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영화사업의 안정적 수행을 위해서라도 사업 다각화를 벌여 나가겠다는 것이다. 사업 다각화에는 중국에서의 극장 사업 확대와 중국 내 홈쇼핑 등 영화와는 상관없는 새로운 사업도 포함된다고 했다.

현재 한국영화가 겪고 있는 위기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만, 영화인 스스로는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도 하나 있다. 흔하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법. 우리 주변에서 '영화'가 너무 흔해진 것은 아닐까. 재능과는 상관없이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로 너도 나도 뛰어든 것은 아닐까. 전국민 5000만명이라는 시장의 한계를 지닌 나라. 이런 좁은 나라에서 적정량의 두 배라는 130여 편의 영화가 매년 만들어지고, 한 대학 걸러 영화학과가 창설되며, 자고 나면 새로운 영화매체가 온라인에 등장한다. 결국 자초(自招)인 것이다.

쇼박스의 새로운 실험이 어떤 성적표를 얻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아마 그 결과는 당연히 실험 자체보다는 내부 인력들의 선구안과 재능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축소지향적이고 조심스런 시도가 위기의 충무로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