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자국마다 '인간 이중섭'의 슬픔이…

건장한 장정 한명도 큰 대(大)자로 누울 수 없을 만큼 비좁은 한 평 반(4.6㎡)짜리 방에서 화가 이중섭(李仲燮·1916~1956)의 네 명 가족은 1951년 한 해를 났다. 바깥세상에선 전쟁이 한창이었다. 제주도 서귀포에 피란 온 이들은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 끼니를 때웠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명예관장 오광수)에서 그의 작품 13점을 모은 《해후 57―서귀포로 오는 이중섭 가족 전》이 열리고 있다. 〈길 떠나는 가족〉, 〈소와 어린이〉 같이 평소에 접하기 힘든 명작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최고 대표작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이중섭이 피란살이 하던 초가집을 둘러본 다음 초가집 뒤에 있는 미술관에 들어서면 1층에 새로 걸려있는 그림들이 '인간 이중섭'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만 같다. 전시작 가운데 〈길 떠나는 가족〉이 특히 돋보인다. 이 유화(油畵)는 개인 소장가가 내놓은 작품으로, 이번 전시가 끝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기약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붓 자국마다 '인간 이중섭'의 슬픔이 짙게 밴 작품이기도 하다.

이중섭 일가는 1952년 궁핍을 견디다 못해 생이별했다. 이중섭은 부산으로, 일본인 부인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야마모토 마사코)씨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흩어졌다. 외톨이가 된 이중섭은 가족들과 함께 서귀포로 피란 가던 기억을 떠올리며 〈길 떠나는 가족〉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 속 네 식구는 피란이 아니라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몸짓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화폭 가득 역설적인 서글픔 같은 것들도 배어 나온다.

이중섭 가족들이 서귀포를 떠나던 날, 부인 이씨는 그간 공짜로 방을 내준 동갑내기 집주인 김순복(88) 할머니에게 "이 집에서 보낸 1년이 평생 가장 행복했다"고 허리를 숙였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당시 딸 다섯에 시어머니와 우리 부부까지 여덟 식구가 방 다섯 칸짜리 이 초가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우리 영감님이 불쑥 이중섭 일가를 집에 데리고 와서 1년 간 같이 살았다"고 했다.

"우리 영감님이 보기에 길 바닥에 앉아있는 모양이 측은했던가 봐. '우리 집이라도 갈 테냐'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더래. 이중섭 부부는 참 좋은 사람들이었어. 이중섭은 밤낮 뭔가를 그렸어. 난 그림을 잘 몰라. 그래도 '참 잘 그린다. 기술이 있구나' 생각했어." 도화지, 은박지, 장판지, 널빤지 등 손 닿는 곳마다 그림을 그리던 이중섭은 김 할머니의 집을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에서 행려병으로 객사했다. 전시는 20일까지. (064)733-3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