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이세돌 "지존 가리자"

이창호(33)와 이세돌(25) 둘 중 누가 더 센가. 지금의 바둑계로선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다. 몇 가지 데이터 상으론 이세돌이 앞서 있다. 이세돌은 국내외 6관왕, 이창호는 5관왕이다. 랭킹도 11개월 째 이세돌이 1위, 이창호가 2위다. 하지만 프로들에게 물으면 하나같이 "붙어봐야 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진정한 우열은 맞대결을 해봐야 가려진다는 것. 두 기사 정도의 위치라면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둑계 구조다. 한데 둘의 만남은 지난 1년 간 한 번도 없었다. 소속이 다른 이창호와 조치훈이 지난 봄 20여일 사이 3연속 대결했던 것과 비교된다. '용케 서로를 피해 다녔던' 두 숙적이 마침내 함께 링에 오른다. 세계 최고 우승상금(40만 달러)이 걸린 제6회 잉창치배 준결승전이다.

오는 23일 방콕서 시작될 이번 3연전은 양웅 모두에게 일생일대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우선 이창호의 입장을 보자. 그가 현재 보유 중인 세계타이틀은 마이너 기전인 중환배 1개뿐이다. 메이저 급만 따진다면 세계 제패를 맛본 지 3년 반이나 지났다. 역대 세계최다 우승(20회) 기록 보유자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세돌도 여유로운 처지는 아니다. 올해 초반만 해도 국제대회를 휩쓸 듯한 기세였지만 이후 주춤하고 있다. 국내에선 후배 홍성지에게 한 칼 맞아 물가정보배를 잃는 등 오히려 실지(失地)했다. 게다가 국내 랭킹 점수에서도 2위 이창호가 바짝 추격해 온 상태다. 이번 대결서 패할 경우 1위는 다시 내놓아야 할 입장이다.

당사자들도 상대방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 2002년 후지쓰배 제패로 첫 세계등정에 성공할 무렵만 해도 이세돌은 "실력으론 내가 세계 제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이창호는 좀체 잡히지 않았다. 2007년 이세돌은 국내 최대주주로 올라섰지만 "이창호 사범님이 가장 센 것 같다"로 말을 바꿨다. 기량이 성숙해지면서 오히려 이창호 바둑의 매서움을 깨달은 결과였다.

올해 신년벽두 '바둑 대상(大賞)' 시상식장에서 이창호는 폭탄선언(?)을 했다. "금년엔 이세돌 사범을 겁나게 만들어주겠다."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그 속엔 뼈가 있었다. 과묵한 이창호가 특정인을 겨냥해 '농담'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로선 대놓고 이세돌을 1인자로 지목하기 시작한 바둑계 분위기를 참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통산 45국을 겨뤄 이창호가 25승 20패로 앞서 있다. 이세돌은 초창기 열세를 2004년 따라잡았다. 그 해 여름까지 15승 15패. 바둑계는 흐름 상 이세돌의 추월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창호는 이후 바람처럼 7연승을 내달려 다시 격차를 벌렸다. 이세돌이 각종 데이터에서 1위에 오르고도 이창호를 껄끄러워 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잉씨배는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 등 한국의 당대 1인자들이 차례로 우승 바통을 이어받았던 대회. 2005년 5회 때는 창하오(常昊)를 앞세운 중국이 처음 우승했다. 한 박자 늦었지만 이세돌은 그 '엘리트 코스'를 꼭 잇고 싶은 심정이다. 이창호는 "한 번 기회를 줬는데 못했으니 다시 내 차례"란 심정일지 모른다.

둘 간의 번기(番棋)승부는 2006년 1월 국수전 도전자 결정 3번기 이후 무려 2년 8개월 만이다. 이번 승자는 최철한 대 류싱(劉星)전 승자와 패권을 다툴 예정. 이 대결이 끝나면 둘은 11월 18일 삼성화재배 8강전서 또 한 번 맞대결하게 됐다. 아무튼 이제는 '결판'을 내야 할 시점까지 왔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