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배우의 통장을 불려준다? 배우가 통장을 바치게 한다!

2008년의 김기덕은 '감독'이라는 호칭 못지않게 '제작'이라는 크레딧에 자주 등장해 왔다.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진출했던 전재홍 감독의 '아름답다', 그리고 이번 추석 명절에 개봉해 일주일 만에 65만 명을 모으며 작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장훈 감독의 '영화는 영화다'. 두 감독 모두 자신의 연출부를 거친 '제자'들이고, 두 작품 모두 그의 시나리오와 시놉시스(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16일 밤 광화문의 작은 극장 스폰지에서 '제작자 김기덕'을 만났다. 그는 우선 몇 가지를 전제했다. 자신은 이들의 '후원자'이지 '제작자'가 아니라고 정정했고, 실제 제작자의 역할 역시 김 감독 밑에서 오래 고생했던 "송명철 PD와 강영구 PD의 공(功)"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리고는 솔직히 저예산 영화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한참을 주저했다고 했다. "제작비가 적다고 하면 관객들이 가난한 작가주의 영화나 우울한 영화를 떠올리는 선입관 때문에 오히려 흥행에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가 거둔 작은 성취(成就)를 충무로가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침체된 한국 영화산업의 대안이자 돌파구"로서 말이다.

1000만 영화도 흔해진 한국 영화 시장에서 65만 관객(물론 흥행은 현재진행형이다)이 뭐 대단하냐는 반문(反問)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다'의 속내를 파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김 감독은 그동안 15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던 이 영화의 순제작비가 사실은 6억 5000만원이라고 처음 실토했다. 지난해 한국 상업영화 순제작비 평균(35.4억·영화진흥위원회)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기껏해야 열 개 남짓한 스크린에 걸리는 게 평균적인 운명이었고, 기껏해야 십만 명에도 못 미치는 관객을 모으며 쓸쓸히 사라져갔다. 하지만 서로를 닮아가는 영화배우(강지환)와 깡패(소지섭)를 소재로 한 이 박력 있는 남성 영화는 첫 시사회를 마치자마자 대중성과 작품성을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으며 개봉 당일 무려 320개 극장의 러브 콜을 받았고, 이번 주말에도 '맘마미아' '신기전'에 이어 예매 순위 3위를 달리고 있다.

또 하나의 놀라운 대목은 주연 배우인 소지섭과 강지환이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비의 35%를 자기들 돈으로 직접 투자했다는 점. 김 감독은 "배우들이 개런티를 받지 않고 흥행 후 인센티브를 받는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자기 통장에서 돈을 꺼내 직접 투자한 경우는 전례가 없을 것"이라면서 "이 영화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헌신적 참여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추석 연휴 이 영화의 흥행을 보면서 이제는 (제작비와 배우들의 직접투자 등을) 정직하게 공표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한 때 그는 외국보다 국내에서 더 홀대 받는 자신의 영화를 한탄하며 대중들에게 위악과 자학의 언어를 쏟아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40대 후반. 자신의 작품은 물론, 후배와 제자들의 작품까지 책임져야 할 선배이자 스승의 위치가 된 것이다.

김 감독은 "장훈 감독은 6억~7억원 정도의 돈을 들이고도 흥미와 재미, 내용을 모두 갖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면서 "많은 돈을 쓰는 영화인들과 많은 돈을 들인 영화만 좋아하는 관객들도 이번을 계기로 생각을 좀 바꿔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화는 영화다'가 한국 영화의 새 돌파구가 되기를 바라는 '제작자 김기덕'의 소박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