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LG배 세계기왕전] 흑 투항(投降)

〈제12보〉(142~164)=패(覇)는 왜 요물(妖物)로 불릴까. 전혀 예상 못했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패란 이름의 이 도깨비는 바둑판 위를 춤추듯 날아다니다가 엄청난 교환을 성사시키곤 깔깔대며 사라진다. 개미 한 마리로 집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잡혀있던 대마에 숨을 불어넣는 신통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수들은 그 어지러운 변화를 노려 조자룡 헌 칼 쓰듯 패를 이용해 권도(權道)를 부린다.

하지만 패싸움의 원리는 사실 너무도 간단하다. 팻감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냉정하게 이 원칙에만 충실하면 어떤 도깨비를 모셔오더라도 도리가 없다. 144의 용패(用覇) 때 한 번 단수쳐 본 뒤 147로 패를 해소했다. 148로 따내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팻감이 부족하다. 우하귀, 우변 일대가 모두 백의 팻감 공장이다.

그러면 153까지는 이렇게 될 곳. 우상귀와 좌상귀의 교환은 어땠을까. 부분적으론 손해가 없었으나 판이 좁아져 흑의 패배가 좀 더 확실해졌다는 게 요점이다. 154의 침입 때 흑은 참고도 1 이하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158까지 또 당한 결과. 포식한 백이 이번엔 164까지 중앙에서 채찍을 휘두르자 흑은 마침내 백기(白旗)를 들었다. 허망하면서도 안타까운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