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저보고 청순함을 벗으래요"

"감독님께서 절 보자마자 '모든 사람이 인아 역에 당신을 떠올렸다'고 하시더라고요. 되물었죠. 제가 발칙하게 생겼냐고. 나름대로 청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에이, 어쩌겠어요. 배우한테 이중적인 모습이 있다는 건 매력 있는 거라고 합리화시키는 거죠."

삼청동 카페 안이 손예진의 웃음 소리로 가득 찼다. 남의 남자와의 사랑(외출), 끼 많은 코믹 바람녀(작업의 정석), 헤어진 남자와의 재결합(연애시대), 열정적인 팜므 파탈(무방비 도시) 등 평범치 않은 역할을 소화했던 그녀였지만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 앞에선 다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원작인 동명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대충 짐작하겠지만, 인아는 남편에게 "나 또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게다가 실제로 결혼까지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이러니 '완벽 캐스팅'이라는 말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을 수밖에. "처음엔 '김혜수 선배님이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어요. '바람피기 좋은 날'이나 '타짜'에서 보이신 농염하고 당당한 모습 때문에요. 근데 절 원하시더라고요. 관객들이 인아에 대해 공감할 수는 없더라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역시 손예진이다. 동그란 반달 눈으로 눈웃음을 치며 덕훈(김주혁)에게 "나 근데 평생 자기만 사랑할 자신은 없어. 사랑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해" 하는 대사가 이상하게 밉지가 않다.

"인아는 스스로 '객사(客死)가 꿈이야'라고 외칠 만큼 집시 같은 여자예요. 이 남자 저 남자 요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랑이고, 진실된 사람이에요. 뭐랄까. 파리지엔(parisienne)들이 느끼는, 그런 감성의 소유자인 거죠."

인아가 되려고 감정이입을 계속 했지만 성적(性的)으로 자유분방한 인아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여자들은 왜 좀 청순하고 순수해 보이고 싶어하잖아요. 보통 여자였다면 '남자 친구가 날 바람녀로 생각하지 않을까. 놀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알아도 모르는 척 했겠죠." 농밀한 대사 때문에 시나리오 읽으면서 포르노를 몰래 보는 것처럼 얼굴이 자주 빨개졌다.

손예진은 20대 배우 중 연기력이 뛰어난 걸로 꼽힌다. 배우를 꿈꾼 건 중학교 때부터. "어릴 때부터 성숙했던 것 같아요.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생각이 많았던 것 같고. 평범한 꿈을 꿔도 의미를 많이 부여했다고 얼마 전에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진데요. 요즘 '살인의 해석'이 좋더라고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내용 중에 프로이트와 융의 갈등이 나오거든요. 완전히 빠져 들면서 읽었어요. 제가 원래 프로이트 심리학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요." 사물에 대한 관심이 어릴 적부터 깊었듯이 연기에 대한 '끼'도 타고난 듯하다. "나만이 갖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았어요. 그걸 막 표출하고 싶었죠. 연기하면 모든 걸 발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끼도,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은데 "저 약골이에요. 사랑과 일을 동시에 완벽하게 해 낼 만큼 체력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아요"라고 한 발 물러선다.

이제 26세지만 유부녀 역할을 여러 번 맡아서인지 실제보다 나이를 많게 보는 사람들도 적잖다. "형부가 성형외과 의사거든요. 얼마 전에 '살짝 손댈까요?'하고 물었더니, '왜 이젠 얼굴로 승부하려고?'라고 하시는 거 있죠. 제가 그나마 '난 성형 미인은 아니니까'하고 자랑하고 살았는데 말이에요." 그녀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제 뭐, 완벽히 연기력으로 승부해야죠. 전 정말 연기 잘해야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