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모음을 레고 블록처럼

여기는 서울 도심. 눈을 감고 귀를 연다. 들려오는 소음들을 집적한다. '쿵쿵' '뚜뚜' '뛰뛰빵빵' '뚜벅뚜벅'. 시끄러운 소리들은 똑 떨어지는 의성어로 우리의 뇌에 입력된다. 이번엔 귀를 닫고 눈을 열 차례. 알록달록 눈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간판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약국, 노래방, 만화방, ○○호프….

영상디자이너 노승관(38·사진)씨는 이런 소음과 간판처럼 우리에게 '공해'로 치부되는 것들을 한글 글꼴의 소재로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다. 낱말퍼즐같이 생긴 네모 칸에 한글 자모를 하나씩 넣고 그들 각각이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게 영상을 만든다. 예컨대 도시의 소음과 사물을 주제로 한 작품 '한글 패브릭'은 이렇다. '쿵쿵'이라는 의성어는 'ㅋ, ㅜ, ㅇ'의 자모로 분절되고, 각각의 자모는 낱말퍼즐의 네모 칸 같은 공간에 들어가 움직인다. 'ㅇ'은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고, 'ㅋ'은 상하로 'ㅜ'는 좌우로 움직여 마치 자모가 뭉쳐 '쿵쿵'이라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한글 비트 박스'라는 작품엔 할머니, 아빠, 이모, 형 등 가족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총 출동해 얽혀있다.

한글을 통해 일상을 재발견하는 방식의 노씨 작품은 요즘 한글 다시 보기 열풍과 맞물려 인기를 끌고 있다. 을지로2가 SK텔레콤 건물 1층에 있는 아트전광판 '코모'에서 진행 중인 '이상한글'전에 참여하고 있고, SK아트센터 '나비'에도 전시 중이다. 서울디자인올림픽 'Design is Air'전에도 출품해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노씨는 "한글의 독특한 조형적 구조를 화면에 풀어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레고 블록을 끼워 맞추듯 자모를 끼웠다 뺐다 하고 새로운 단어를 조합하는 과정을 화면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외국에서 그의 작품은 더 주목 받는다. 지난 9월 열린 런던디자이너스블록에서는 런던의 유명 디자인 관계자들이 그의 작업을 보러 몰려왔다.

원래 심리학을 전공했다. 시각적인 인지에 관심을 가졌다가 이를 영상과 결합하고 싶다는 생각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과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Arts)에서 뉴미디어를 배웠다. 그는 "이제 영상이 건물의 한 부분으로 융합되는 과정에 있다"며 "한글은 그 과정을 가장 예술적으로 풀어줄 수 있는 도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