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회 LG배 세계기왕전] 두 폭의 그림

〈제8보〉(122~137)=보슬비 뿌리는 고즈넉한 산사(山寺). 16명의 전사들이 심해(深海) 같은 침묵 속에 미동도 않은 채 대좌했다. 대국장 풍경은 살아있는 정물화다. 기합 실린 바둑돌 착점음이 정적을 깰 때마다 사생결단의 현장에 와 있음을 깨닫곤 한다. 눈을 창 밖으로 돌리면 만해마을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로 다가온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잿빛 덩어리들이 백담사 중턱을 휘감았다. 함초롬히 비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미풍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린다.

122는 이른바 반상(盤上) 최대처. 125 치중(置中)이 진작부터 박영훈이 노려오던 점이다. 그렇다고 큰 수가 나는 자리는 아니고 136까지 선수로 외곽을 정비하겠다는 뜻이다. 일종의 사석(捨石) 전법으로 고수들 바둑에서 자주 등장하는 상투수단이다. 수순 중 130이 한 번 비틀어 본 수. "전혀 예상에 없던 점이었다. 내가 안 되는 수를 두었나 싶어 순간적으로 당황했었다."(박영훈)

흑도 131로 136에 한 칸 뛰는 수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성립한다면 물론 횡재일 텐데, 아쉽게도 그게 잘 안 된다. 참고도 4를 선수하고 6에 붙여 11까지 흑의 수 부족. 아무튼 흑은 목표를 달성했고 예정했던 대로 137에 붙여갔다. 싸움은 군화(軍靴) 자국이 가장 적었던 우하변 일대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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