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래된 붓의 뜨거운 고독

1976년 2월, 미대 다니다 입대한 스물세 살 일등병이 최전방에서 보초를 섰다. 자정쯤 내무반에서 폭음이 울렸다. 동료 병사가 또래들이 잠든 내무반으로 수류탄을 날린 것이다. 범인은 밤새 쫓기다 이튿날 새벽 수색대와 마주 선 채 자기 턱 밑에서 수류탄 핀을 뽑았다.

청년이 속한 내무반에서 여섯 명이 죽었다. 그 뒤 청년은 보초 서러 갈 때 군복 품에 손바닥 만한 스케치북을 숨겼다. 보름달 뜬 들판에서 산과 나무, 철책과 개구리를 그렸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최전방에서 보낸 달빛 환한 적막한 밤들이 화가 오원배(55·동국대 교수)씨 작품세계에 밑거름이 됐다. 그는 어두운 색채와 거친 질감으로 탈 쓴 남녀, 미로 같은 구조물, 푸르스름한 인간 군상을 그려왔다. 19일~12월 3일 서울 삼청동 리씨갤러리에서 열리는 《존재와 의미의 이중풍경 전》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삶은 포괄적인 것, 들여다볼수록 복잡한 것, 부처와 장자가 말씀하셨듯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에 그는 100호 넘는 대작 10점을 냈다. 컴컴한 도시를 그린 캔버스와 만개한 꽃을 클로즈업한 캔버스를 나란히 세우고, 두 폭을 한 점으로 센 것이다. 18~19세기 유럽 고서(古書) 표지에 같은 소재를 그린 소품 10점도 있다. 대작이건 소품이건 그가 그리는 꽃은 언제나 생명의 절정에 달한, 무르녹듯 만개한 꽃이다.

"꽃은 아름다운 동시에 공허하죠. 지금까지 제 그림이 어둠을 통해 밝음을 드러내려는 작업이었다면, 앞으로는 밝음을 통해 어둠을 보게 하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인천 유동에서 태어나 갯벌과 선창을 누비며 자랐다. 중·고등학교 땐 스케치북을 들고 쏘다니며 쇠락한 중국인거리와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바다를 그렸다.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친 뒤엔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에 모두 거리를 뒀다. "미술은 집단화될 수 없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민중미술과는 맞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니멀리즘을 하자니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접한 표현주의적인 구상회화를 돌파구로 삼았다.

그는 애주가다. "늘 시장바닥 어딘가의 술집에서 두주불사하되, 몹시 취하고도 이튿날 어김없이 작업실에서 붓을 드는 사람"이라고 지인들은 말했다. 그림과 술 말고 다른 낙이 있다면 여행이다. 그는 한 달에 한두 번,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씩 오래된 절에 틀어박힌다. 스케치북 한 권에 줄거리가 복잡하지 않은 소설책 두어 권을 지참하고 하릴없이 절과 절을 떠돌다 온다.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거죠.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그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전국 맛집도 샅샅이 다닐 수 있고. 미술은 '생물'이죠. 저는 진화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타성에 젖는 것이 싫었어요." (02)3210-0468